“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이소영, 2019)
이소영, 2019,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 서울시 이태원에 대한 역사인류학적 연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문화적 엔클레이브. 주류 사회와는 다른 문화를 보이는 고립된 공간을 뜻하는 이 개념, 사실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 같은 예시를 들면 금방 떠올릴 수 있지만 생각해본다. '코리아타운'에는 정말 한국 가게만 있고 한국 사람만 살고 있을까?
인류학 석사학위논문 연구를 자기 고향에서 해 낸 이소영은, 이태원이라는 고향을 '문화적 엔클레이브'로서 읽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에스닉 엔클레이브'를 벗어난 관점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차원을 읽어낼 수 있는 '문화적 엔클레이브'의 시선에서 이태원을 읽어내는 시도를 한다.
"인류학에서 주로 관심을 가졌던 문화적 엔클레이브는 이민자 집단에 의해 형성된 에스닉 엔클레이브였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 같은 에스닉 엔클레이브에 주목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특정 민족성에 기반을 두고 어떻게 문화를 유지하고 활동하는지 분석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문화적 엔클레이브가 에스닉 연구에 치우져 있다는 사실은 한계로 자리하게 된다. 점차 하나의 민족에 국한되지 않은 채 유지되는 문화적 엔클레이브들의 존재가 현대 도시에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영, 2019: 9)
이태원의 변화 역시 미군기지 하나만 가지고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저자는 이태원이 "문화적 이질성 자체는 유지되면서 이를 구성하는 요소나 성격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고 강조한다(op cit.: 3). 이태원이 다양한 요인으로 변화해 온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내부자인 한국인의 목소리를 듣기로 결정했다. 사실 인류학은 내부자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이러니하게 대부분의 이태원 연구는 그곳을 사용하는 외국인의 목소리로만 채워져왔다. 어쩌다보니 한국인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운 곳이 이태원 아니었던가.
저자는 특히 그 중에서도 이태원의 의류상권 변화에 주목했다. 도시의 상업공간을 "단순히 거래를 위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문화적 규범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공간"(op cit.: 6)이라고 본 저자는 이태원에서는 의류상권이야 말로 이태원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핵심 맥락이라고 본 것이다.
저자는 과거에 대한 인류학 연구를 하기 위해서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진 인터뷰와 당시 신문기사, 현장 사진 등을 잘 겹쳐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저자의 서술을 더욱 신뢰하게 해준다. 인터뷰의 내용이 신문기사와 비교되어서 분석되며, 현재 사진과 인터뷰의 내용, 저자의 서술이 '크로스 체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 역시 이태원에 대해서 조사하고 보고서를 써 본 경험이 있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흔히 90년대 이태원에서 '호객한다며 강매시키는 형들'이 세일즈 2세대였다는 점, 또는 지하철역 개통이 외국인 관광객이 빠지는 시기와 맞아떨어지면서 한국인들로 채워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다.
저자는 "지금껏 인류학의 문화적 엔클레이브 연구가 주목하지 못했던 원주민들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op cit.: 97)해본다는 점, 또 이태원이라는 곳에서 "누가 공간의 이질성을 생산해 내는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이태원이 보여주는 이질성의 성격은 매번 새로워졌다"(op cit.: 96)면서 급속한 변화 속에서 70여 년간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역동적인 문화적 엔클레이브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에스닉 엔클레이브가 아닌 문화적 엔클레이브로의 시선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가지 궁금한 점은 이태원의 '이질성'이라는 것이 그 성격은 달라져도, 어떻게 계속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이태원의 이질성'이라는 장소성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자한테 물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