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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까말까 리스트

zingari.JQ 2019. 11. 12. 12:38

읽을까 말까 고민 중인 책들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해보고자 한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알폰소 링기스(저), 김상균(역), 2013, 바다출판사, [Alphonso Lingis, 1994,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on, Indiana University Press].

한겨레, 2013.4.12., "공동체는 과연 합리적인가", 문화, 책&생각, [http://www.hani.co.kr/arti/PRINT/582611.html].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의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는 공동체에 대한 통념을 전복하는 책이다. 대개 공동체는 언어·신화·역사 등을 공유하며, 그것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고 통합을 다진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공통의 정치질서와 경제질서 등 누구나 수긍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이른바 ‘합리적 공동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공동체의 합리적 측면이 강조될 수록 개인의 고유성은 상실되는 아이러니. 이런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사람들, 즉 고유의 개인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광신도, 야생인간' 등으로 낙인찍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에 굴복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합리주의를 통해 타자를 희생시키고, 그 기반 위에 공동체를 세운다. (여기서 공동체는 은유적 표현인 것 같다. 지역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닌듯, 아마 '국가 공동체' 정도 수준)

  저자는 대안으로 '타자 공동체'와 '죽음 공동체'를 제안한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그 죽음 앞에서 우리는 타자를 보살피고 잘 보내준다는 것이다. 이 사유는 저자의 여행에서 시작된다. 풍토병이 걸려 죽어가는 자신을 도와 바다를 건너 100km이나 떨어진 도시의 병원에 데려다주고, 고요히 떠난 어부. 이 경험으로 저자는 낯선 이와 형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좀 추상적이고 낭만적이다)

  "나는 타인이 비우고 떠난 자리에 태어나고, 타자들이 걸었던 길위에 서있는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타자들이 파악하고 이해한 가능성들의 현장이요, 타자들을 위한 가능성의 현장이다." (왜 타자들을 위한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붙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나의 온 삶이 타자와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가능한 공동체가 바로 죽음 공동체인 셈이다." (타자와 공유하는 삶이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해했음. 근데 현대의 '합리성'이 '진정한 공동체'를 죽인다는 뜻에서 그 대안인 '죽음 공동체'를 불러본 것에 대해서는, 다른 것으로 바꿔서 생각해봐도 될 것 같음)

  흔히 공동체를 내부에서 바라보면서 무엇이 중심에 있고 작동하는가에 집중하는데, 저자는 거기에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생긴다. 공동체를 안과 밖에서 봐야한다면, 저자는 어떠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가? 문제의 지점으로 '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임스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나 <약자들의 무기>에서 논의되는 '다른 합리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개인을 억압하는 공동체에 대한 지적은 흥미로운데, 그게 '합리성' 뿐이 아니라도 개인을 억압하는 공동체는 항상 있어왔다. 중세에 공동체들이 개인을 억압한 것은 '합리성'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공동체의 내부에서 작동의 원리 -상징이나 의례, 정신 같은 균일성-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것은 아닌가? 과학과 기술, 자본에 대한 합리성은 최근에 생겨난 그 중 하나일 뿐이고. 그렇다면 공동체를 안과 밖에서 봐야할 필요가 더욱 생겨난다. 안승택이 지적한 '공동체의 살갗'을 보자는 논의는 바로 공동체를 움직이던 사람들, commoner, 바로 민중들의 입장에서 공동체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이야기여서, 여기에 연결되는 함의가 있다.

  죽음이라는 공통점, 이것을 commons라고 생각한 저자는, 나에게 좀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지만, 이걸 연결할 지점들이 있다. 시흥 복음자리 공동체를 만들 때, 제정구 선생과 정일우 신부는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원리를 깨닫는다. '무언가가 있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진 것들이 없어서 모이는' 다시말해, 부족한 것을 공유하면서 모이는 사람들. 저자는 '아무것도 공유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복음자리 사례를 통해 '없다는 자체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없다는 것을 공유'하는 건 어디서 좀 더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을까?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인도네시아의 생태적 변화 과정>, 클리포드 기어츠(저), 김형준(역), 2012, 일조각, [Clifford J. Geertz, 1963, Agricultural involution : the processes of ecological change in indones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출판사 서평 참고

  알렉산더 골든와이저가 주창한 involution을 기어츠는 "기존에 확립된 형태가 과도하게 이용되면서 세부요소의 내향적인 정교화를 거쳐 고정된 상태"라고 정리한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기존의 형태가 상이한 구조로 변환하지 않고 원래의 특성을 활용하여 기존 형태를 변형되지 않는 범위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involution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기 파괴적 과정', '변화 없는 변화', '정적인 확장' 등의 표현으로도 알 수 있듯이, 퇴화의 의미도 담고 있다.

  기어츠는 경제 발전을 이루는데 involution을 겪은 인도네시아를 "상실된 기회의 모음집이며 낭비된 가능성의 저장소"라고 표현했다. 역자는 involution을 밖으로 뻗어나간 것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어간 정교화 과정으로서 '내향적 정교화'라고 번역하였다.

involution은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는 개념이 되었는데, 그만큼 이 개념은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반증한다. 기어츠는 20년 후 자바농업에 대한 다른 글을 내면서 involution이 '퇴화'보다는 '복잡화'라는 측면을 강조하였고, 다른 인류학자들도 많은 연구에서 '정교화'의 의미로 이를 사용하였다.

  나는 이 involution 개념을 네트워크에 접목시키고 싶은데, 바로 '확장하지 않는 네트워크는 죽어간다'는 논지를 펼치고 싶어서 그렇다. 이는 '네크워크의 확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더 나아가 '네트워크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의 경계는 사실 각 점마다 각 선마다 경계일 수 있다는, 그리고 그 경계에 '어떠한 불확실성'을 두고 있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거꾸로 들여다보자. 내부의 작동을 강화하고 복잡화하는 과정을 네트워크가 발전했을 때, 점차 죽어가고 있는 현상을 분석한다면? 그리고 이를 넘어서고자 외부의 확장을 계속 시도한다면? 그리고 그 외부와 어떠한 접점을 두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본다면? 그렇다면 '네트워크의 안과 밖'을 보면서 '작동하는 총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경제인류학 수업시간에 오명석 선생님께서 잠깐 언급하신 말씀을 듣고 찾아보았다. 무릎을 탁 쳤다. 아, 이건 읽어봐야겠구나!



 <이재유 나의시대 나의혁명 -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 김경일, 2007, 푸른역사.

<이재유 연구>, 김경일, 1993, 창작과비평사.

<식민지 노동자의 벗 이재유>, 안재성(글), 장선환(그림), 2008,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보는 우리시대의 인물 이야기 9, 사계절출판사.

<경성 트로이카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2004, 사회평론.


  개마고원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재유는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기 어려웠으나, 그때문에 당시 조선 엘리트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문제의식을 접근한다. 사상과 이념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 민중들의 삶에서부터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몸을 던진 민중 사회주의자. 코민테른(국제 공산주의)의 지령에 따른 움직임이 아닌, 풀뿌리의 삶에 기준을 두고 운동을 벌인 도시 게릴라. 

  경성 일대에서 벌어진 1930년대 대 파업은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의 작업이었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식민 노동자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무엇이 부족했고, 어떻게 이를 공유했는가'의 지점에서 이재유의 운동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무엇보다, 이런 인물을 존경하고 싶다. 


<네트워크의 지리학>, 허우긍 외, 2015, 푸른길.

  인류학이 네트워크 연구 초기에 문을 열었던 한 획을 갖고 있으나, 그 '헛발질' 비판으로 네트워크 분석을 등지고 떠나있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여러 글에서 '네트워크'를 언급하면서, 이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은유'에서 시작해 특수한 사례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공동체'와 굉장히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공동체가 '당연히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경합적인 개념이 되는 것에 비해, 아직 네트워크는 '좋은 것일껄?' 수준으로 막연하게 불려지고 있으며 아직 경합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는 네트워크의 방식으로 분석해야 한다는게 석사논문 때부터 이어지는 내 주장인데, 이는 도시 안에서 '마을'이나 '공동체'로 불려지는 것에서 시작해서, 자본주의 안에서 '협동의 경제'를 만드려는 운동 역시 네트워크 분석으로 보자는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네트워크 분석은 인류학적인 것을 뜻한다. 네트워크를 물리적인 것, 또는 정량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구분된 지점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네트워크 안에서 사회적자본(관계)가 금융자본(돈)으로 바뀌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지표로 가치를 측정하는 일로 파악을 시작할 수 없다. 무엇이 목적으로, 어떠한 수단으로, 무엇을 자원으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려면, 인류학적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이걸 어디서부터 찾아야할지 걱정인데, 우선 지리학에서 네트워크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좀 살펴보면 약간이라도 방향이 잡히지 않을까 싶어서 골라봤다. 


<국가·경계·질서 -21세기 경계의 비판적 이해>, 가브리엘 포페스쿠(저), 이영민 외(역), 2018, 푸른길.

  경계 연구하면 역시 정치지리학이다. 2004년 학부 때 울릉도의 경계에 대한 현지조사 보고서를 쓸 때도 정치지리학의 경계 연구를 소중하게 참고했었고, 꽤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 정치지리학에서 현재의 경계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특히 국가의 경계라는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닌 21세기 상황에서는 더욱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 같다. 

  '새로운 공동체'를 네트워크로 읽으면서 그 안과 밖을 보겠다. 그 안은 관계와 사상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그 밖은 국가와 시장, 사회와 만나는 접점인 경계에서 바라보겠다는게 지금 시도인데. 여기서 경계에 대해 '단디'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리, 이 책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