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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임권택, 1991)

zingari.JQ 2025. 1. 6. 13:13

임권택 감독, 김용옥 각본, 1991년 작 영화 '개벽'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삶을 다룬다. 1992년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으나, 4.5만 명 정도가 보면서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다보니, 고증에 꽤 신경썼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흔히 '동학'을 다룰 때,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벌거벗은 한국사'를 봐도, 다른 만화책을 봐도, 민주화운동 당시 언급을 봐도, 12살 때 동학 답사를 다녀왔던 기억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1893년 보은에서 전국의 동학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른바 혁명 vs 개벽의 구도로 전봉준과 최시형이 대립하는 장면은 꽤 흥미롭다. 정읍 도부군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에게 사람들의 뜻을 모은 상소를 올렸다 뭇매를 맡고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보며, 민중 분노의 도화선이 된 전봉준의 입장에선 1894년 '혁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시형 역시 '개벽'의 기조는 지켜내야 했을 것이다. 폭력이 아닌, '삶 속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야' 진정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871년 영덕 영해부에서 이른바 '수운 최제우의 교조 신원 운동' 만을 한다며 허락을 받은 집결은 이내 '봉기'로 바뀌며 영해부를 점령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잠잠해진 동학 탄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영화는 그러한 경험이 최시형에게 녹아들어갔다고 보는 듯 하다. 

1864년 수운 최제우가 처형당하며 해월 최시형에게 남긴 말. '나는 일찍 죽지만, 너는 오래 살아 남아 멀리 나아가거라' 스승의 그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도망다니며 살았던 최시형. '살아 남는 것'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전봉준과 최시형의 충돌은 실제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지점이다. (https://youtu.be/2o5qaC8sdew?si=NR8d0tgcDJyVWjpE어쩌면, 그 둘의 기조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동학의 방향성, 더 나아가 의미가 더 생겼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각본 김용옥'이라고 크레딧이 올라가길래, '도올?'하고 찾아봤더니 그 도올 김용옥이 각본을 쓴게 맞더라. 평생 동학을 연구해온 표영삼 선생, 그리고 김지하에게 자문을 구해 각본을 섰다고 하니, 원주를 연구하며 '원주 보고서' 그리고 '한살림 선언'을 다뤄야 하는 내겐, 중요한 연결이 되는 작품이 되었다. (https://www.kmdb.or.kr/story/143/4412)

 

 

그런데, 정말 궁금해지는 건, 최시형이 평생을 도망다니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동학이 이렇게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

동학의 조직구조인 '접'과 '포'가 그야말로 소셜 네트워크 연구자에겐 흥미로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도 언급하지만, '같은 마을이라도 다른 접이면 서로를 모른다'던 방식은 그야말로 이게 네트워크의 방식으로 조직화가 만들어진 것인데, 그게 서로를 모르게 하는 기능도 있겠지만 이렇게 잘 퍼져나가는 기능도 있었을 것 같다. 이건 좀 천천히 찾아보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https://brunch.co.kr/@sichunju/49)

그러한 점에서 이어서 생각해볼 게, '집강소'이다. 전봉준의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고종이 토벌을 위해 청나라 원군을 요청했더니 텐진조약 때문에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면서) 서둘러 봉기룰 수습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조정과 농민군이 합의 하에 만든 농민자치기구, 집강소. 다시는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의 횡포가 생길 수 없게, 자치기구를 설립한 셈인데, 이는 동학의 '포접제'가 응용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관련 자료나 논문이 있는지 좀 더 찾아봐야겠다. (https://www.dbpia.co.kr/pdf/pdfView.do?nodeId=NODE11569231)

 

쫓기던 발걸음이 산간 속 암자(정선 갈래사 적조암)에 다다르고, 입적을 하려던 노승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씬.

"부처와 하늘님은 어떻게 다릅니까?"
"동학이 말하는 하늘님은 귀신입니다."
"귀신이란 뭡니까?"
"음양입니다."
"음양이란 뭐죠?"
"사람입니다."
"사람을 천지의 주체로 삼는다... 그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동학의 으뜸가는 가르침은 사람의 평등이며, 평등하기 때문에만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동학은 젊군요. 이 땅에 부처님은 나처럼 너무 늙었습니다."
(개벽, 1:07:09~1:09:09)

이 장면이 '생성과 소멸'의 관점에서 소셜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나로서는 매우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흔히 인간 평등 사상을 가져온 '서학'에 비교되어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국가의 정신이던 유교를 '북학', 조정에 핍박을 받아왔던 불교를 '남학'이라고 불렀던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서학과 동학만 붙여서 생각할 때는 흔히 '서구 사상의 영향으로 한반도에서도 평등 사상이 시작되었다'고 흔히 이야기될지도 모르겠으나, 남학과 북학을 함께 생각해본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생성과 소멸'의 관점에서, 왜 이 시대에 동학이 '생성'되고 있었는지를 더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큰아드리가 읽던 만화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35년',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이리저리 들쳐보며 동학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보고 있으니, 물어본다.

"아빠 뭐해?"
"아빠가 동학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어.
원주 연구하다가, 오산학교에 관심이 생겼고, 그러다 동학까지 오게 됐네."

"동학은 왜?"
"흔히 동학이 비록 우금치에서 실패했다고 여겨지지만,
아빠 생각엔 동학이 계속 흘러오면서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게 아닐까 싶어서.

만주에 이상촌을 만든 것도 그렇고, 3·1 운동이 그랬고, 어린이날도 그렇고, 
어쩌면 지금 촛불집회도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광장에 나와서 외치는 저게 뭘까...
원주에서도 동학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 거 같아..."

나만 느꼈을까? 아드리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언젠가 '근대사'를 알고 싶다길래 사준 만화책들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그러더니, 어떤 상상력이 생긴걸까? 아빠가 읽던 동학 부분을 아드리가 다시 펼쳐서 보는 걸 보니, 어쩌면 동학이 아이에게 세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소중한 동아줄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궁금한 것들은 계속 이어진다.

조병갑이라는 악연.
동학농민운동의 영향과 일본 외세의 압력으로 생겨난 근대 법정에서 최초로 사형을 받은 이는 전봉준. 그리고 1898년 원주 호저에서 밀고로 잡힌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린 법관은 조병갑. (헐... 무슨 비극도 이런 비극이...) 1907년 수운 최제운과 해월 최시형의 죄명을 취소해달란 청원서를 고종에게 전달하는 이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 대신 조중응이었다. 당시 공종 실록을 보면 동학교도가 200여 만 명이 된다고 적혀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1_003) 최시형은 지금의 단성사 앞에서 교수형을 당했는데, (사형 판결을 내린 게 그 조병갑이라니...) 2006년 사망 108년 만에야 천도교에서 장례를 치렀다. 

김구와 안중근.
황해도 해주에서 1893년 동학에 입교한 김창수는 이내 수천의 신도가 생기며 '아기접주'가 되었고, 보은에서 최시형을 만나 접주 첩지를 받는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한다. 당시 안태훈이 이끈 진압군의 선봉엔 16세의 안중근이 있었다. 3살 위인 김창수는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고,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하며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그러나 김구와 안중근은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 큰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잡지 '개벽'.
1920년 간행된 잡지 '개벽'은 왜 사라졌을까? 김소월의 "진달내ᄭᅩᆺ", 방정환의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 이상화의 " ᄲᅢ앗긴들에도, 봄은오는가" 등이 실렸던, 만 여명의 독자가 있었던, 당대 유력했던 이 역사적인 잡지는 어떻게 봐야 할까? (https://www.youtube.com/shorts/X9C2C-TAkVQ

 글을 어찌 마무리할 지 몰라, 이상화의 시를 읊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서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는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민들레 제비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김을 매는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갔느냐 우습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음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