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박진도·한도현, 1999)
박진도·한도현, 1999, "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의 농촌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특별기획: 1930년대와 1970년대 관제 동원운동의 비교 연구, 「역사비평」, 47: 37~80.
대중동원 방식
이처럼 새마을운동을 그 구체적 사업내용이나 목표를 가지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또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된 대중동원 이데올로기 또는 대중동원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마을운동이란 국가 최고지도자(박정희 대통령)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 혹은 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전체 행정조직을 이용하여 전 국민을 동원한 운동이다. 따라서 새마을 운동은 처음부터 정연한 이론이나 체계를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고, 최고지도자의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한때 국정의 최고 정치철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철학과 이상이 운동의 모든 것을 좌우하였고, 유신체제와 더불어 영고성쇠를 함께하였다는 의미에서 박정희라는 개인 그리고 유신체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p.39
강신표, 1984, "새마을과 헌마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지역개발조사연구단, 「새마을운동 이론체계 정립」.
김광억, 1984, "농민의 전통성과 합리성",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지역개발조사연구단, 「새마을운동 이론체계 정립」.
참고문헌 중
왜 시멘트였는가?
"…김성곤 의원(쌍용시멘트 대표)은 박대통령에게 시멘트의 과잉 재고로 인한 시멘트업계의 자금난을 호소하고 특별 재고 융자의 배려를 요청하였다. 박대통령은 남아도는 시멘트를 부진한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당부했다. … 1970년 10월 전국의 농어촌 3만 4,665개 부락에 300부대에서 350부대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1970년 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의 회고록에서)
p.44
박정희는 제1차 연도 사업에 대한 면밀한 평가를 내무부에 지시하였고, 각 군수들의 조사결과 전국의 약 3만 5천 마을 가운데서 1만 6천여 마을이 좋은 반응과 성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되었다. 박정희는 제2차 연도에는 첫해에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 6천 마을에 한해서 평균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내무부와 여당은 지원받지 못한 마을의 반발로 공화당이 선거에서 지지받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재고를 요청했으나, 박정희는 "스스로 협동하는 마을은 적극적으로돕되 노력하지 않거나 협동하지 않는 마을은 돕지 않겠다. 이 길만이 수천 년 내려온 의타심을 뿌리뽑고 자조하는 정신을 자각시키는 길이다. 이와 같은 방침으로 설령 선거 때 표를 못 얻어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은 바꾸지 않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P.47
마을 선별지원 방식
새마을사업의 선별지원 방식은 1973년 정부가 전국의 마을을 주민의 참여도와 발전수준에 따라 기초, 자조, 자립마을로 분류하고 차별적 지원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기초마을은 문자 그대로 새마을사업이 이제 막 시작된 마을로 새마을가꾸기 사업을 주로 추진하는 마을로서, 정부는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 등 기본적인 지원만 하였다. 다음 단계의 자조마을은 정부의 기본 지원을 받아 대체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마무리되는 단계에 있는 마을로서, 가꾸기 사업 이외에 공동소득사업 등을 실시했고, 정부는 그 성과에 따라 응분의 지원을 했다. 최종단계의 자립마을로 승격되면 자조마을 단계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공동소득사업을 위시하여 생산기반사업, 문화복지사업, 소득구심사업, 생산협동사업 등의 사업을 벌였다. 정부는 자립마을을 새마을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케하기 위하여 우선지원 방침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초기 사업선정에서 경제성의 원칙보다는 물량적인 가시적 성과가 뚜렷한 사업 우선 원칙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사업의 선정 이외에도 전국의 모든 마을을 기초, 자조, 자립마을로 구분하여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지원을 한 것도 농촌주민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농촌개발에 참여토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부의 지원을 주로 자립마을과 자조마을에 집중하고 성과가 좋은 마을일수록 지원을 더 많이 한 것은 기초마을 주민들이 이웃마을의 성과에 자극을 받아 스스로 새마을사업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P.49
유신과 동원체계의 구축
1972년 10월 유신의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하여 "새마을운동을 국가시책의 최우선 과업으로 추진한다"고 명시되면서, 중앙부처와 각급 협동조합중앙회 그리고 도·시·군·구에 새마을운동을 전담하는 공식적 행정조직체(새마을담당관, 새마을지도과 등)가 생겨났다. 그리고 1973년 11월 22일의 제1차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이 '유신의 실천도장'으로 강조되면서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와 밀착되어 초기의 농촌사회개발운동을 벗어나 정치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