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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자본 관련 메모

zingari.JQ 2021. 3. 29. 18:54

사회 자본 관련 메모들을 계속 모아볼 생각이다. 


'사회 자본' 정의를 파헤쳐보자

사회적 네트워크, 신뢰, 호혜

이 세 가지 키워드가 퍼트넘의 정의에 등장하는데, 사실 하나하나가 애매한 또는 엄청 큰 개념이다. 

사회적 네트워크

퍼트남은 유대가 강할 수록, 신뢰가 강하고, 정치적 경제적 성과가 높다는 '좋은 말'만 했는데,
그라노베터의 '약한 유대' 개념을 붙여보면, 부딪히게 된다.

그라노베터는 '약한 유대'가 직업을 구하는데 더 유용하며, 설문을 해보니 새 직장을 얻는데 '신뢰할만한 친구나 동료'보다 '별로 끈끈하지 않은 사람'이 도움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퍼트남의 1차 방정식을 2차 방정식으로 옮겼달까, 논의의 차원을 복잡성으로 살짝 가져다놓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 현실의 복잡성은 훨씬 저 멀리에 있다.
(여기에 각종 게임이론을 가져오려면, '공리'라는 높다란 적대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문제가 있으니... 그건 좀.. 나중에...)

호혜

(자, reciprocity로 하루 죙일 썰을 풀어볼 준비가 되어야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며...)

호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좋은 관계' 정도
이러려고 나온 말이 아닌데, 타전공이나 일반인들이 이렇게 쓰다보니 인류학 내에서도 그냥 '좋은 말'로 쓰는 경우가 생길 정도이다. 

이거에 대한 시작은 마르셀 모스이며,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에스키모' 사례 분석에서부터 시작해, '증여론'까지 끌고 가보고... (여기엔, 권헌익 선생님의 속 시원한 글을 참고해보자)

호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학 내에서도 굉장히 애매해서,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헐렁한 그물'이라는 지적에서 시작해서 이를 정교화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을 좀 담아볼 수 있겠다. 

신뢰

(아, 신뢰는 아직 고민 중인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신뢰, 개인이 소속된 집단이나 지역에 대한 신뢰, 집단과 집단 사이의 신뢰를 기계적으로 나눠봐도
에스노그라피를 하다보면 당연히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느냐를 보게 될 텐데...

되게 '막연한 신뢰'를 발견하게 된다면? 무슨 선택을 하는데 이 '막연한 신뢰'가 계속 작동하게 된다면?
(퍼트넘의 '좋은 개념'을 좀 뒤집게 될 것 같은데... 보통은 마피아 사례 드는데, 그게 아닌 '내향적 정교화' 같은 방향으로...)

경제적 효과에만 국한

굳이 '사회 관계의 효과'를 사회 '자본'이라고 표현한 건, 변동성이 크고 형태가 바뀔 수 있는 특징 때문일테고,
더 나아가 '사회 관계'를 '자본화'할 수 있다는 목적이 숨겨있다. 
이익이 되는 '자본화'가 되지 않는 '관계'를 굳이 '사회 자본'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사회 관계의 작동'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과가 있다는 논리에 턱 걸리는 게 있다. 정치적 성과 과정를 경제적 투입과 결과로 보고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사회 자본' 개념에 불편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사회 자본'이라는 개념은 경제적, 화폐적 효과가 있는 범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전환

그렇다면 '사회 관계'가 어떻게 '자본'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 전환의 과정을 잘 포착하는 게 필요하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문화자본, 사회자본, 금융자본을 설명했단 논의를 좀 가져올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는 특권층이 갖고 있는 자원들이 필요에 따라 실제 돈으로 바뀔 수 있을 정도의 '전환'에 주목했고, 더 나아가 그 전환이 작동되는 '장'을 설명했다. 이걸 좀 응용해보자.

(특권층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을 만들었다면?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이? 

더 나아가 이게 작동되는데 있어 그 '장'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한다면?

장 & 경계넘기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내부의 경합적인 작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이고, 보통 그 경계는 닫혀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에 비해 퍼트넘의 논의에는 '결속―연결연계'라며 다른 레벨을 두고, 이걸 넘나드는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안과 밖'을 함께 보는 논의를 여기서 끌어내려면?
(안승택&이경묵의 '공동체의 안과 밖'에서부터 뭔가 단초를 하나 잡아서 끌고 올... 수 있을까...)

인류학에선 왜 '사회 자본'이 안 보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현장에서 에스노그라피를 작성하고 이를 가지고 이론화하는 인류학에서 신기하게도 접점이 아주 많은 이 '사회 자본'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일상적 관계에서부터 다양한 '집합적 실천'의 역동성을 다루는 인류학의 에스노그라피는 관계, 상징, 물질이 연계되어서 종교-정치-경제-자연 뭐가 되었던 복합적인 실천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다루는 경향이 강한데,
이건 사실 '사회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다뤄졌던 퍼트남, 부르디외 등의 시도들과 꽤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인류학이 '사회 자본'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다. 하도 주변 인류학자들이 '그건 아니야...'라고 하셔서...

 

 

그래서?

무진장 나열되어 있는 상태이네.. 여기서 선택적으로 좀 초점을 좁혀야 할텐데...

만약에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면, 이 글의 결론은 어디에 모아져야 할까? 눈에 보이는 뭔가로 초점을 맞출 수 있으려면... 뭐가 좋을까... 

지금 그냥 생각나는 건, '사회 자본'을 활용하기 좋게 분석적 개념화를 하겠다는 거? 과연...
3개의 키워드로 함축해서 '네트워크, 호혜, 경계' 뭐 이렇게?

 

 

 

고민에 갇혀 사는 불쌍한 중생의 넋두리입니다, 혹시라도 읽으시더라도 훔쳐가지 말아주세요... 벼룩의 간...

 

아니 근데, 논자시는 이런 걸 3개나 만들어야 한다고? 진짜.. 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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