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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RO, Eduardo Viveiros de, 2009, Métaphysiques Cannibales: Lignes d’anthropologie post-structural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https://www.puf.com/content/M%C3%A9taphysiques_cannibales),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저), 박이대승·박수경(역), 2018,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후마니타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13735614)].

"21세기 사상의 탈인간중심주의를 대표하는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베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아마존 원주민들은 인간과 동물에게 같은 종류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고 재규어를 포식자 동물로 보지만, 재규어는 자신을 인간으로 보고 우리를 잡아먹을 동물로 본다. 동물도 인간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행위자라는 것이다.
서구 근대주의적 사유에서 보면 아마존 원주민의 우주론은 비합리적인 야만인의 사유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21세기 사상에서는 지구적 생태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원주민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마존 원주민은 동물, 식물, 무생물, 기상 현상, 인공물 등 모든 비인간에게 인간과 동등한 영혼이 있다고 보고 이들과 공존하고자 한다. 아마존 원주민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목적 때문에 비인간 존재를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서구의 '식민화'와 '근대화'란, 자신이 이 세계의 보편적 진리를 담지한다고 내세우면서 비서구의 토착적 지식과 실재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정복한 행위이지 않았던가?"

김환석, 2020, "들어가며: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감문해력연구소(편),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이성과 감성, p. 15.

카스트루는 『식인의 형이상학』에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기존의 탈식민주의 기획조차 자기 비판의 관심은 여전히 타자가 아니라 서구 자신을 향했다고. ‘오리엔탈리즘’을 읽으며 ‘탈서구’를 기대했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했던 실망을 생각해본다. 서구 중심의 사상적 위계 안에서 우리 역시 그렇게 공부하고 글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근데, 카스트루는 인간과 동물이 ‘동등하게’ 생각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되레 ‘닫힌 대비’를 넘어 ‘열린 확장’을 강조하며 ‘깔대기’의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암튼…)

사회의 상상력, 다시 생각하다

카스트루는 인류학 이론들이 '사회들이 가진 풍부한 상상적 힘'에서 자기 원천을 가져온다고 보았다(p.14).
"인류학은 예전에 그 타자들이 그들의 자기종족중심적인 비시간적 고치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는데, [사실] 인류학이 연구하는 바로 그 타자들의 특징을 이루는 태도[자체]가 바로 인류학이라는 것이다. ... 타자들의 타자 역시 '타자'라는 것이다. 즉, '우리'라는 것을 위한 자리는 타자성에 의해 이미 규정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p.296)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p.15)이라고 여전히 믿는 이들에게 묻는다. "'타자'는 언제나 서구의 추악한 이해관계에 따라 '재현'되거나 '발명'"되지 않았냐고.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진정으로 모든 식민주의의 '원천이자 기원'이다"(p.22). 그래서 거대 분할자들에 맞설 '작은 다양체들'을 증식시켜보자, '소수의 인류학'을 해보자고 주장한다(pp.22~23).
카스트루는 여기서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를 만나게 해준다. "'닫힌 문법적 조합'으로서의 구조와 '열린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구조"(p.284) 사이에서 차근히 '원주민의 관점주의'를 사유한다.

원주민의 관점주의: 식인과 재규어

'원주민의 관점주의'는 새로운 상상을 제시한다. 원주민 세계에서 그들이 가진 '관계적 상상력'(p.30)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하나는 '식인'이고, 다른 하나는 '재규어'이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지시하는 용어이다"(p.46). 인류학의 에스노그라피를 통해서 여러 종족의 이름들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많은 부분 '인간 존재자들', '진정한 인간들' 같은 의미의 단어가 많이 있다. 카스트루는 여기에서도 '자신/타자'의 대조가 나타난다고 본다. 종족의 이름들은 그러한 점에서 에스노그라퍼와 종족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인공물'이라고 주장한다(p.46).
그리고는 되레 '인간' 개념보다 '인격'이라는 개념이 더 우선된다는 반전을 제시한다. 내적 잠재력에 따라 구성되는 지향성으라 볼 수 있는 '인격'은 흔히 우리가 '인간'과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재규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원주민 인간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고 재규어를 잡아먹는 동물로 보겠지만, 재규어 역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고 인간을 잡아먹을 동물로 본다. 인격들이다. 인간이 목마를 때 마시는 '맥주'가 있다면, 재규어에겐 '피'가 있다. 아마존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인간이고, 인간이란 또 다른 사물이다"(p.54).
하지만 조심하자. "맥주 : 피"라는 닫힌 구조가 아니다. 이 관점에선 "맥주\피\..." 처럼 다른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열린 구조이다. 카스트루가 "모든 '거대 분할자'는 단자연주의"(p.54)라며 비판하며, '다자연주의'(p.55)를 제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카스트루는 기존 인류학의 고전적 규율들에 대해 역해석을 시도한다. 유럽의 다문화주의 안에서 인류학의 목적은 "원주민의 시점에서 체험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서술"하려고 했다면, 원주민의 다자연주의는 다르다. 흔히 우리가 '식인'에 대해서 갖는 '이해할 수 없어!' 태도를 벗어나보자. 원주민의 다자연주의 안에서 보면, "인간 섭취는 적대자의 시점을 물리기호학적으로 포착하는 것을 자기 서술의 생존 조건으로 받아들인다"(p.176). 이것이 '인류학으로서 인간섭취'이다.
여기서 중요한 함의가 떠오른다. 아라웨테인의 전쟁 노래를 들으면서 이 생각이 떠올랐다고 카스트루는 말한다. "살해자는 적대자를 통해 자신을 적대자로 보거나 적대자임을 자처하는데, 그는 죽은 적대자의 관점에서 이렇게 한다"(p.176). 적대자를 통해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방식. 이것이 아마존 원주민의 관점주의이다.

적대성이 관계성이라면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동일성에 근간을 두고 '형제'라고 부르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은 서구 기독교 중세에서 생각되고, 지금 한국에 우리도 공동체를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카스트루의 '원주민 관점주의'에 따르면, 딛고 있는 전제를 바꿔야 한다. 적대자가 관계성이다. 적대를 통해 주체를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엔 공동체의 '내부' 또는 '상징'이 중심이고 우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마존 원주민의 관점주의에 따르면 공동체의 외부가 우선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원시사회란 내부가 없는 사회로, 오로지 자신의 외부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는데 성공한다. 그 사회의 내재성은 그 사회의 초월성과 일치한다"(p.178).
그러면 친족을 '혈통'과 '동맹' 사이에서의 구조로 파악하던 인류학의 친족 연구를 이렇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친족연구 초기에 '가계도'로 그려가며 '피'를 공유하는 혈통을 중심에 두고 '동맹'이라는 확장을 덧붙여서 생각해왔는데, 이를 거꾸로 보는 것이다. '동맹'이라는 확장, 다시 말해 적대자를 관계성으로 보고 거기서 자기 자신들을 찾아내던 방식으로 아마존 원주민의 '사회적 상상력'…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를 다시 해본다면...? (이쯤 되면 '네모, 세모, 선'으로 표현하며 친족구조를 묘사하고 상상하던 방식은, 그 '네모, 세모, 선' 안에 갇혀 원주민의 상상력을 담아내지 못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우리 인류학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계가 있고, 이러한 다우주(multiverse)에서는 모든 관계가 사회적이며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다"(p.54). "혈통적이고 주체화하는 생산의 기계"(p.300) 안에서 생각하던 인류학이 과연 "동맹, 친족관계의 고유한 타자-되기"(p.300)의 사고로 전환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아직 가능성이 있다. "인류학자들은 밧줄에 관한 이론을 실천해왔다. 즉, 관계에 대한 이론 말이다"(p.285).

샤먼과 인류학자

그러한 점에서 카스트루는 '샤먼'의 존재에 주목한다. "샤먼들만이 관점들을 서로 소통하도록 해줄 수 있고"(p.65), "샤먼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이 그들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면서, 종횡단적 대회에서 적극적인 교섭자 역할을 맡을 능력이 있다"(p.48). 아마존 원주민들의 샤머니즘에서 "인식한다는 것은 '인격화하기'이고, 인식되어야 하는 누군가의 시점을 취하는 것"(p.49)이다. "'타자'의 형식은 곧 인격이다"(p.49). 카스트루는 원주민의 "모든 '되기'는 동맹"(p.209)이고, 들뢰즈의 "'되기'가 '이중의 비틀림'"(p.286)라고 강조한다.

이 책의 옮긴이는 카스트루가 샤먼과 인류학자의 유비 속에 메세지가 담겨있다고 본다.
"이 책에는 관점의 번역을 수행하는 두 종류의 특권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샤먼과 인류학자이다. 저자가 이 둘의 유비적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샤먼으로서의 인류학자 혹은 인류학자로서의 샤먼이라는 발상은 인류학적 번역을 정의하기 위한 효과적인 개념을 제공한다"(p.309).
더 나아가 "애매한 기호는 번역의 장애물이 된다. 반면 다자연주의적 우주에서 하나의 재현이 여러 대상을 지시한다. 우리도 맥주를 마시고 재규어도 맥주를 마시지만, 맥주라는 하나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은 여럿이다. 여기서 애매성은 기호의 본성이다. 그리고 번역이란 같은 기호가 지시하는 여러 대상 사이의 차이를 포착함으로써, 애매성이 초래할지 모를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샤먼의 첫번째 임무이다. 샤먼이란 다른 존재자의 관점으로 이동할 능력을 갖춘 특권적 인물로서, 예컨데 우리의 관점과 재규어의 관점을 왕복하며 재규어의 맥주와 우리의 맥주가 같지 않음을 알려주어야 한다"(p.308).

이 책을 번역한 자가 카스트루와 한국 독자 사이에서, 샤먼과 인류학자 사이에서 알려주고 있는 메세지. 그보다는 그 태도. 새로운 생각을 하는 다우주적 분화가 아닐까.

세미나를 끝낼 시간이 되자 우리는 바로 책을 덮고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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