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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재유, 민중 사회주의

zingari.JQ 2019. 10. 2. 23:45


1930년대, 식민지 아래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생들의 휴업이 잇달아 일어난다. 경성에서는 5개월 사이에 8개의 경공업 공장에서 파업이, 7개 학교에서 동맹 휴업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 한 가운데 이재유라는 인물이 있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한다. 감옥 같은 기숙사에서 한 달에 한 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도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여성 노동자들은 언제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 없는 곳에서 혹사당한다.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 이재유


1920년대까지 엘리트 중심의 사회주의 성향이, 1930년대에 비판의 목소리가 생기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8시간 노동 보장, 퇴직금과 가족수당 보장 등을 주장했던 바, 새로운 농법 전수, 야학 한글교육, 저리 대출 등의 농민운동까지 전개했던 바, 이재유는 당시 사람들이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민중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사상을 전개하였다. 


검사: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데 무슨 까닭으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가?

이재유: 내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함은, 일본에서 독립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없고, 설령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해도 일본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재유 피의자 신문조서 제4회", 1937.5.1.;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재인용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747#self



이재유는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황토 속살처럼 부드럽고 결고운 시적 감수성이 있었고, 앎과 함을 같이 굳세게 밀고 나가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 마음을 울릴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한 주의자였다.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재인용


이재유는 계급적 편향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의 노동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혁명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민족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조선의 독립과 ‘조선적’ 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운동에 헌신하였다.
… 이재유는 코민테른 등의 국제조직에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거나 교조적이고 경직된 이론을 고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의 현실에 대한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운동방침을 수립해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 대중의 역할과 아래로부터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재유는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중에 대한 지도라기보다는 대중운동에 대한 응원의 차원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재유는 혁명적이었던 것만큼 민족적이었고, 민족적이었던 것만큼 민중적이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KBS, 2019.7.21., "사라진 남자, 1급 사상범 이재유", <역사저널 그날>, 230회

김경일, 2007,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 푸른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9.10.02.검색, "이재유(李載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747.

이재유, 1937,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 감옥 자술서.

서울대저널, "어두운 시대를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삶, 이재유", 서울대저널, 83호, http://www.snujn.com/news/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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