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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직 때가 아닌 듯. 


1장, 서론

쿨라는 경제라는 것이 명성과 의무의 도덕과 연결시키는 논의를 열었지만, 여전히 거기서 이러한 장, 어떻게 그 규칙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전혀 다른 현장이지만, 원주에서 이를 볼 수 있다면?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이 어떻게 그 장을 열고 유지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특히 이를 내부와 경계를 동시에 보면서,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로 본다면?


2장, 이론적 검토

쿨라를 네트워크로 본다면? '외교적' 관계 맺음을 설명하는 것과 이게 '섬내' 공동체에서 작동하는 것을 결합해서 본다면?
낸시 문 <가와의 명성>에서부터 시작해본다면? 

공동체를 경계에서 바라보는 관점들. 앤서니 코헨 <공동체의 상징적 구성>에서부터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면역체>, 안승택 이경묵의 논의까지 연결해본다면? 

네트워크를 경계와 내부의 역동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도. 각 점에서의 경계를 넓히는 행위자 네트워크, 아상블라쥬의 시도들과 다른 지점을 찾아야 함. (왜?) 공동체를 경계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를 빌려와서 생각해본다면? 


3장, '새로운 공동체'의 발견

장일순 선생은 틈새를 발견한 분 아닐까?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 국회의원 출마 등을 시도했으나, 권위주의-자본주의 국가로 인해 지역에 묶이게 되었고. 거기서 지역을 발견한 건 아닐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틈새를 발견했고, 거기서 동학운동의 인내천 사상, 노장사상 등에서부터 발견한 지점은 무엇이었나?

로버트 오언이 '사회를 발견'했다고 폴라니는 평가하지만, 내 생각에는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는 틈새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지역 내에서 협동의 가능성을 본 점에 대해서 쭉 논지를 만들어보고, 이게 과연 '사회의 발견'으로 불리기가 어렵다는 점을 논의해본다면? 당시 사회운동과의 거리감도 분명히 있었고, 어디서 지령을 받아와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 사회주의와는 다른, '민중 사회주의'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사회'를 떼놓고 바라본다면? 


4장, 소와 시멘트 사이에서

1972년 남한강 대홍수는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 운동'과 원주 캠프의 '협동조합 운동'이 산골마을에 들어가서 경합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원주 캠프가 마을에 가지고 온 '소'와 박정희 정부가 가지고 온 '시멘트'는 마을에서 어떠한 일을 만들어냈는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경합에서 '노 맨스 랜드'의 성격은 없는가? 불확실성 바깥에 있는 누군가를 조우하게 되는, 서로를 인지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소'만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시멘트'와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함. 


5장, '원주 정신'과 서울 사이에서

박정희가 갑자기 죽고, 예상치도 못하게 전두환 정권이 세워졌을 때  원주 캠프는 태세를 전환했다. 한살림과 생명사상. 어디에 선을 긋고 다른 위치를 세웠는가? 왜? 

그리고 새로운 확장을 시도하면서 '서울 한살림'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원주와 떨어진 '서울 한살림' 창립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파고들면서, 일종의 시장과 '원주 정신'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보자. 


6장, 무엇을 내세우는가

70년대 도바리를 치던 손학규는 원주 캠프에 숨어 있었고, 40년이 지나고 그는 '협동조합 특별법'을 발의하였다. 협동조합이 드디어 법령으로도 공식화가 되면서 이제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주로 견학을 가고, 원주시청 자체도 이를 중요한 도시 브랜드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주 캠프는 무엇을 보여주고 내세우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 

그게 흔히 여겨지는 협동조합 선진지인 '몬드라곤'과 '퀘벡'과는 어떻게 다른가? '볼로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원주'는 이러한 '모델'로부터 어떻게 변주하는가? '모델로서 원주'는 서울과 전국 각지에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가?


7장, 결론

시대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협동의 방식'을 새롭게 전개하려고 했던 시도. 어쩌면 트로브리안드 섬에서부터 19세기 로버트 오언과 20세기 장일순 지학순까지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자세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관계의 안정화. ... 

(... 어 이게 빠졌네...) 원주가 '협연'이라고 부르는 네트워크를 들여다보면, 가난한 사람들끼리 자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은 서로의 '관계'였다. 흩어져 있는 가난한 이들을 연결하면 그 사이의 관계에서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산촌이나 광산촌에 구판장을 만들어 내는 일은 거기서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삶의 터전이 홍수로 날아가버린 이들에게는 그들의 자연과 연결할 수 있는 '소'를 배치하면서 다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하였다. 다시 '소'를 3년 뒤에 '송아지'로 갚는 일은 '지연된 되갚음'으로 자본을 증식시키는 일이 가능했다. 관계망이 만들어 졌을 때는, 사람들에게 부기회계를 교육했다. 관계망 사이에서 오고가는 자본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신협협동조합 역시 그점과 연결되었다. 도농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한살림은 의도치 않게 '시장과의 관계'를 두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살림은 '원주 한살림'의 정신을 두고 '서울 한살림'의 형식이 지배하는 형태 아닌가? 신협 중앙회에 '원주 정신'이 남아있는가? '새마을 금고'와 다른 점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전국 각지에서 원주를 찾게 되면서 '모델링'이 되고 있는 과정은 어떻게 봐야 하나? 장일순 선생이 찾았던 '틈새'는 어디가고, 다시 '모델'이 복제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새로운 공동체'에서 '새로운'은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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