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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70년대에 바침

zingari.JQ 2023. 12. 12. 17:54

 

신해철, 1996, "70년대에 바침"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 않았지
...
 
나에게 80년대는 혼란의 유년기였다.


슈퍼 앞에서 놀다가도 국기 하강을 하면 가슴에 손을 얹었고
성화 봉송에 동원되어 깃발은 흔들었지만 
88올림픽을 좋아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집에 데려가서 광주 학살 사진집을 보여주던 친구에게
'우리 집에도 이런 거 있어'라며 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그 때, 
군화발에 짓이겨진 턱이 돌아가버린 사진을 펼쳐놓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고모, 삼촌들이 많이 오셨다.
수배 당한 이름 모를 운동가들도, 아빠의 동료들도 오시면 일단 좋았다.
그 무릎에 앉아 늦게까지 안 잘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창고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셔서 가위로 자르고 계셨다.
형과 함께 종이를 신나게 찢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그때 조금 표정이 어두우셨다.
아마 고모와 삼촌들이 잡혀갔던 것 같다.

외삼촌 이야기도 생각난다.
'처남, 서점 가서 한 잔 할까?' 
아버지와 외삼촌이 봉천동 서점으로 건너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형들'이 핏대 세우며 싸우는 걸 열심히 듣고 계셨다고. 
그렇게 변절할 거면서, 왜 그리 핏대를 세웠을까.
 

아버지의 70년대는 어땠을까?
아빠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동료들이 잡혀가는걸 보면서도, 
어떻게 계속 운동을 이어가셨을까?

10월 13일 형이 태어났고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을 맞고 사라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양 무릎에 앉혀놓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거라고
형과 나를 안아주시던 아빠를 생각해보면, 
아마 기대감 아니었을까? 

그리고
1979년 이 날, 아빠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새로운 독재자가 서울을 점령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오늘 12월 12일,
나에겐 혼란의 80년대가 시작된 날이다. 

아빠가 보고싶다. 
그때 어땠는지 물어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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