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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으로 회귀(권헌익, 2018)

zingari.JQ 2024. 3. 18. 01:34

놀랍다. 2018년 권헌익 선생님의 '자연과 사회' 수업을 들을 때,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은 함께 있던 것입니다, 떨어질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는데. 이 글을 읽으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니, 몇 년간의 고민이 여기서 풀리는구나 싶었다. 드디어 돌아돌아 여기로 돌아왔다는 느낌이랄까. 

수업 메모에는 이렇게 적어놨었다.
"사회학은 인류학 뒤에 생겨났고, 인류학에서 사회라는 건 사회과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회 '안'에 있는데 '밖'에 있는 것처럼 연구하고 결론을 내려야한다. 인류학자들의 방법론은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혼밥을 아무리 먹어도, 우리는 혼자가 될 수 없어. 아무리 혼자 먹어봐, 더 사회적으로 되지. 혼자 먹으면서 사회를 생각하게 되죠."
"레비-스트로스가 등장하는 건, 가지치기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데스콜라가 여기서 벗어나려고 엄청 노력하는 거 같고,
잉골드는 여기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
"하지만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은 항상 함께 했다. 그러나 인간 존재라고 불러주는 건 사회를 가져오는 토테미즘이었다. 토테미즘을 봐야 둘 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의 명제는 이럴 것이다.
"새로운 애니미즘에는 새로운 토테미즘이 필요하다."


KWON, Heonik, 2018, "Return to Animism", Interdisciplinary Science Reviews, 43-3~4: 228~236,
'From science to art and back again: The anthropology of Tim Ingold', (https://doi.org/10.1080/03080188.2018.1528083).
 
 

1.

 

팀 잉골드의 놀라운 지적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점점 더 창의적인 길을 따라 계속되고 있다. 1992년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그의 작업을 처음 발견한 이래로 25년 넘게 그를 알고 있다. 현재 널리 읽히고 있는 그의 많은 작업들은 1993~1995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잉골드의 후배로 내가 있던 후에 발표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작업들에서 시도한 아이디어 일부는 이미 당시 ―세미나실에서, 그리고 그와 가족들이 머무는 볼브룩 에비뉴 집에 친히 초대해 열린 스태프들과 대학원생들의 정기적인 모임에서― 여러 화제가 되었다. 당시 그 아이디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해 온 방식에 나는 집중해 주의를 기울였다. 부분적으로나마 우리가 지역이나 주제에 대한 공통된 관심―극지방의 토착 수렵 사회에서 인간-환경 관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정신적 환경(spirited environment) 또는 애니미즘으로 알려진 것을 포함한다. 글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중심으로 잉골드의 최근 작업을 성찰할 것이다. 나는 애니미즘이 그의 작업을 통해 본래 종교적 현상에서 철학적 질문의 실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나아가기 전에, 내가 그의 작업을 발견하게 배경과 관련해 마디 말이 있다. 잉골드는 1970년대 핀란드 북동쪽에 위치한 스콜트 사미(Skolt Sami)족에서 현지조사를 했다(Ingold, 1976). 스콜트 사람들은 순록 사육, 사냥, 어업으로 전통 경제를 구성한 사미족이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했던 지역은 소련 건립 이후 개의 영토로 나뉘어진 오늘날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나는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 사할린 섬에 있는 토착 순록 사육 집단농장에서 현지조사를 했다. 소련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있던 1990년대 초였다. 그때는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중대한 변화의 시기였다.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의 정치적·군사적 대치 상태가 종식되고 이후 평화롭고 통합된 세상이 오기를 기대했으나, 보스니아 전재의 충격과 함께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한 시기 1990년에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에서 지구 생태학(global ecology)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행성 규모에서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냉전 종식의 의미, 인류의 생태학적 지속가능성의 지평― 어떤 것도 인류학 교수의 연구에서 아직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잉골드는 이때부터 사회인류학과 인간 생태학(human ecology) 관계를 주도해왔다. 입장에서, 나는 세계의 지나간 과거(immediate past)―–자유 제국과 평등 제국 간 거대한 분열이라는 유산(Kwon 2010)―에 관심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잉골드와 초기 조우(encounters) 배경을 제공하는 분위기(atmospheres) ―그 최근 작업(Ingold 2018)에서 그가 말하는 '조응'의 정신(spirit)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조응(correspondence) 잉골드의 새로운 개념적 도구 하나로, 개별 인간들 사이에서 뚜렷하면서도 중첩되는 삶의 궤적(life trajectories), 또는 ―그의 표현대로― '행려(wayfindings)’에서 일어나는 일을 광범위하게 다룬다(Ingold, 2000: 219~242). 조응의 개념은 '소통(communication)'―언어를 기반으로 두기에 인간 중심적인 개념인―과는 다르다. 또한 조응의 개념은 사회성(sociality)―우리가 받은 지혜에서, 사물과 생각을 개인 간에 공유하는 기술이 주로 발생하는 개인들 사이에 사물과 생각을 공유하는 예술이 주로 일어나는 속에, 내부에 정의되거나 인식되는 실체를 가정하는―과도 다르다.
다음은 내가 잉골드의 지적 행려를 그가 조응의 역사를 가진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또한 글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중심이 행려, 조응 같은 몇몇 개념의 기원을 추적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개념이 북쪽 극지방 수렵 사회의 역사적 현실을 통해 ―특히, 극지방 사냥꾼 이미지와 애니메이트된 환경(animated environment) 관련된 생각을 통해― 보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먼저 근대 사회 이론의 역사에서, 애니메이트된 환경에 대한 생각, 그리고 사회의 정신(spirit of society) 대한 생각을 대립시키며 만들어낸 에피소드(formative episode)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2.

 

현대 사회 이론의 탄생은, 특히 사회 인류학의 계보 안에서, 영혼 이론(theories of soul) 사이의 서사 싸움(epic battle) 포함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하나는 종교 형태(religious form) 밀접한 관련된 애니미즘(animism)이라 널리 알려진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적 측면의 사회 형태(social form) 관련 있는 이른바, 토테미즘(totemism)이다. 형태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근대 인류학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995[1912]) 사회의 본질(nature of society) 대해 혁명적인 논문에서 토테미즘에 대한 믿음을 불러왔다. 그는 특히 에드워드 B. 타일러(Edward B. Tylor) 주장한 애니미즘에 대한 믿음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타일러(Tylor, 1871) 애니미즘을 자연적 종교(natural religion)―자연물에 영혼(soul) 특성을 부여하는 인간의 행위―로 정의했다. 그에게 있어 자연이란 개념은 도덕이라는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타일러는 애니미즘이 도덕성의 문제(옳거나 그른 , 정의롭거나 부당한 )―이는 그가 보기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같은 세계 종교들의 교리에서 중추를 이루는 것이었다―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었다. 사회 질서(social order) 도덕 질서(moral order)였다고 생각한 뒤르켐의 입장에선, 타일러가 자연이란 개념을 '-도덕(pre-moral)' 또는 '-사회(pre-social)' 번역해버린 것으로 보았다. 이는 뒤르켐에게 대단히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타일러가 영혼에 대한 생각을 다루는 방식을 단호하게 꺾었다.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2013)에 따르면, 비록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모두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를 연결시키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이다.
애니미즘에서는 인간-문화 세계(human-cultural world) 자연 세계보다 우위에 있다. 인간 종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의도성(intentionality) 행위성(agency) 속성을 비인간종(non-human species) 또는 다른 자연 실체(other natural entities)에게 부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데스콜라는 토테미즘은 반대라고 주장한다. 자연 실체들 사이(e.g. 다른 동물 사이에서)에서 발견되는 차이들은 인간 집단들 사이의 정체성 차이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인간 종의 속성이 자연 환경으로 확장되는 것을 말하는 반면, 토테미즘은 환경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인간이 하는 것―집단을 만들고 그들의 사회 집단을 다른 그룹과 차별화하는―에 주입힌다. 데스콜라가 강조하는, 자아-및-타자 분화(self-and-other differentiation) 양상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64) 토테미즘을 재해석한 데서 비롯된다. 알려진대로,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는 일찍이 뒤르켐이 토테미즘에 대해 밝힌 ―집단 분화보다 개인을 집단에 묶는 토테미즘의 힘에만 초점을 맞췄다는―에 대한 비판적 지적이었다.

 

뒤르켐에게 토테미즘은 사회의 탄생(birth of society)―개별 인간의 영혼들(souls) 어떻게 집합적 존재의 정신(a spirit) 만들어내는지―을 이야기했다. 뒤르켐이 타일러에게 제기한 문제는, 영혼에 대한 질문을 잘못된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었다. 질문의 적절한 장소는 자연계가 아니라 사회계 안에 있었다. 문제 제기(challenge) 따라오는 뒤르켐의 논리는 이미 알려져 있다.
토템(totem) 인간 영혼의 사회적 부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정령의 상징적인 표현(symbolic expression of the soul)―뒤르켐이 말하는 집합 표상(collective representation)―이다. 토템의 작업은 주로 개인의 존재보다 존재를 위해, 인간 개인이 하나로 뭉치도록 하는 수단이다. 토템은 영혼의 양면 ―인격적(personal) 그리고 비인격적(impersonal) 관계를 가리키며, 이는 뒤르켐이 이중적 인간(homo duplex)라는 강력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토템은 자아(self) 자기보다 존재―가족, 종족, 민족, 또는 같은 논리를 따르는, 인류(humanity) 같은―로 변화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영혼의 개념은 ―가족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적·구조적 층위를 따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파악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 조건을 향한 과학적 탐구 수단으로서 말이다. 애니미즘에 대한 타일러의 해석에서 제시된 영혼의 개념은, 대조적으로 뒤르켐이 내내 헌신적으로 믿었던 과학의 진전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영혼이 -도덕적 , 자연적 삶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사회과학의 맥락에서 영혼의 삶을 탐구할 있겠는가. 뒤르켐이 사회과학 탐구의 의미있는 주제에서 애니미즘을 거부한 배경은 바로 이러한 질문이었다.

 

 

3.

 

이러한 에피소드를 사회과학 초기 역사에서 자연주의적 영혼론(naturalistic theory of soul) 몰락으로 간주할 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뒤르켐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타일러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에서 나오는 과학의 개념은 ―사회적·도덕적 과학의 구체적 의미에서― 잉골드가 논문집의 글에서 말하는 과학의 개념―예술로서 인류학에 자리를 내어준 인류학의 과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적 감각의 대표적인 예시로 알프레드 래드클리프-브라운(Alfred Radcliffe-Brown)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사회 질서의 일반화 가능한 원리(generalizable principles) 인류학에 헌신했다고 본다면,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이후 인류학에서 예술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오른다. 잉골드가 언급하는 다른 과학(other science) 애니미즘의 몰락과 관련된 머나먼 역사에 관한 것―미래 인류학의 움직임이 향할 지평―이다. 다시 말해, 움직임(move) 토테미즘 이전(pre-totemism) 사상적 배경(milieu of ideas)으로 돌아가는 ―타일러 같은 19세기 학자들이 이용할 있었던 것과는 다른 탐구 정신(investigative spirit) 다른 이론 도구(theoretical tools) 가진 지금을 제외하고― 측면을 수반한다.

 

우리는 애니미즘에 대한 오래된 관심과 새로운 관심 간의 차이를 잉골드의 조응 생각의 관점에서 이해해볼 있다. 뒤르켐의 애니미즘 비판은 타일러가 제시한 영혼 개념에 사회적, 도덕적 속성이 없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타일러의 영혼론은 자연물의 행위성을 부각시키는 인간-환경 관계에 대한 상호주관적 관점으로 간주될 있다.
잉골드의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은 인간-동물 공동 행동(human–animal coactivity) 대해 세심하게 다룬 그림을 보여준다. 다양한 에스노그라피 문헌을 바탕으로 사회의 개념에 대한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을 발전시킨다―지리학, 생태학, 심리학의 혁신적 연구에 대해 신중히 검토할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최근 작업들은 음악, 글쓰기, 드로잉, 스토리텔링, 창작 예술에 관한 것들도 있다. 최근 작업은 주제 범위, 학문 장르 모두에서 눈부시게 확장되어 있지만, 그의 프로젝트는 애니메이트된 환경―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연속체의 배열(scheme of continuum) 투영하는 것으로, 인류학과 인접 학문에 의미있는 주제이다―에 대한 아이디어를 복원하는데 집중적인 헌신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아이디어를 ―인간중심주의(androcentrism) 성향에서 벗어난― 인간-환경 관계(human–environmental relationship)에 대한 혁신적인 관점으로 발전시킨다. 이 흥미진진한 시도에서, 조응(correspondence) 개념은 사회성(sociality)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성은 토테미즘의 두드러진 속성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애니미즘에 대한 타일러의 이해에서 뒤르켐이 것―거기에 사회성의 차원이 없다는 것―에 비추어, 잉골드의 조응 개념을 고려해볼 있다. 잉골드의 전략은 어떻게 보면 완전한 움직임(full-circle move)―사회성에 대한 질문이 있는 애니미즘이라는 사상적 배경으로 회귀(return)―이다.
움직임에는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회귀하는 애니미즘의 본향(home) 출발한 지형과 같지 않다. 따라서 잉골드가 설명하는 애니메이티된 환경에 대한 개념은 타일러의 종교에 대한 질문―현상 조사(investigation of the phenomenon) 흐리게 했다고 지적받는―으로부터 자유롭다.
뒤르켐이 토테미즘에 대한 분석했던 것과 같은 방식―분명한 종교적 현상(religious phenomenon)에서 세속적 사회적 사실(social fact) 뒤바꾼(turened)―으로, 애니미즘은골드의 손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를 거쳐 무시할 없는 주제가 되었다. 글의 익명의 평론가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잉골드의 글에서 에니메이트된 환경에 대한 생각은 종종 애니미즘의 현상 자체 ―우리가일러 같은 작업에서 친숙하게 봤던 종교적 형태―와 거의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4.

 

대부분 잊혀진 토테미즘의 -역사(pre-history), 그리고 토테미즘에 기반한 사회 이론의 출현에서 무시되었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 잉골드 말고도 있다. 프랑스 사회이론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최근 사회 연결성(social connectivity)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찾으면서, 뒤르켐의 그늘에 가려있던 동시대 학자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연구를 탐구했다(Latour, 2002).
언급했듯이, 데스콜라(Descola, 2003) 토테미즘과 대등하게, 애니미즘을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로 되살릴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그의 전략은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사회와 자연을 연결하는 대조적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데스콜라는 사회가 자연을 전유(appropriation)하는 (사회들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에서 발견되는 차이를 사용하는 )으로 토테미즘을 설명한다. 애니미즘은 자연과 사회 사이의 동일한 분열을 따라 작동하지만, 명백하게 인간적인 (영혼의 소유)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반대 궤적에서 작용한다.
넓은 스펙트럼에서 보면, 광범위하게 대응하려는 다른 노력은 최근 인류학 연구에서 찾을 있다. 현재 일상 윤리에 대한 관심은 여러 면에서 뒤르켐의 사회 도덕 질서 이론(theory of social and moral order)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뒤르켐이 보기에, 토테미즘은 금기(taboo) ―주어진 사회 규범을 넘어서는 것― 개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도덕 질서일 뿐만 아니라 상징 질서를 구성한다. 일상 윤리(everyday ethics) 관한 최근 연구들은 인간 도덕 실천(human moral practices)―반드시 주어진, 집합적으로 공유된 일련의 규범, 또는 이념적으로 지배적인 도덕 질서에 따라 깔끔하게 패턴화되지 않는―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한다(Keane, 2015; Lamb, 2010).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논의는 존재론(ontology)에 대한 현대적 관심이다. 이러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자들은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인류학의 특징이었던 문화(culture) 또는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 대한 개념에 만족하지 않는다(Holbraad and Pedersen, 2017; Viveiros de Castro, 1992). 이들은 소위 문화적 차이가 특정 토착 개념에서 '자연적' 실존적 차이들(‘natural’ existential differences) 가까운, 훨씬 급진적인 성격을 띠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자극적인 논쟁에 제기된 여러 에스노그라피 사실들은 애니미즘적 현상(animistic phenomena) 관련이 있다. 넓은 플랫폼에서 , 우리는 물질 문화(material cultures) 대한 최근 되살아난 관심(revived interest) 주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행위(agency) 개념을 기존 인간중심적 한계에서, 인간 행동 그리고 사물 행위 광범위한 관계적 배경으로 확장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물이 사회적 삶을 ―이국적인 문화 환경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있다는 생각이다.

 

잉골드의 최근 저술은 인류학, 너머 모든 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라투르의 인간-물질적 관계(human–material relations) 대한 행동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그리고 토테미즘 애니미즘 대한 데스콜라의 구분적 성찰에 관여했다. 잉골드의 작업은 존재론 그룹이 주장하는 가지 아이디어와 대화에 참여한다―비록 집단에서 급진적 문화 상대주의 버전을 지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물질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고고학, 예술, 건축 분야에서 혁신적인 학문과 함께하는 협업으로 발전했다.
그가 대화에 비판적으로 참여한 파트너로는 고인이 인류학자 알프레드 겔(Alfred Gell, 1998)이 있다. 그는 예술 작품을 단지 인간 감상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보는 기존 미술사의 지배적 지향에 도전했다. 잉골드의 최근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 상태는 심리학자 깁슨(J. J. Gibson)일 것이다. 깁슨(Gibson 1966) 인간의 지각에서 움직임의 중심성을 옹호해, 정적이고 안정적인 위치성을 정밀성과 연관시키는 서구 과학 전통의 지배적인 관찰 개념에 도전했다. 깁슨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잉골드는 작업 전체에 중심이 이미지의 새로운 그림 ―인간 사냥꾼이 북쪽 극지방 환경에서 사냥한 것―을 발전시킨다. 

 

 

5.

수렵-채집(hunting-and-gathering) 사회에 대한 관심은 현대 사회 이론의 진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는 19세기 역사적 사고에서 원시 공산주의(primitive communism) 대한 암시뿐만 아니라, 이후의 평등주의(egalitarian) 사회에 대한 관심이 포함된다. 전해 내려오는 인식과 달리, 평등주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고대 사회가 기술적으로는 단순해도,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매우 정교한 이념을 보여준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또한 여기엔 초기 사회 또는 고대 사회의 구조가 호주 원주민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뒤르켐이 진전시킨 사회 질서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발견을 포함한다. 호주 원주민 사회는 정교한 토템미즘 믿음 체계(totemic belief systems)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이들은 환경에 대한 강력한 애니미즘 접근(animistic approaches) 보여주는데, 그들 서식지는 전체적으로 조상들의 살아있는 유산이 풍부한 정신적 경관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Myers, 1991).
인간-환경 관계에 대한 잉골드의 포괄적인 접근(general approach) 수렵-채집 연구에 오랫동안 참여한 결과라는 점도 중요하지만(Ingold, 1986; Ingold, Riches, and Woodburn, 1991a, 1991b), 앞서 언급한 극지방의 수렵 사회에서 에스노그라피를 시도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Ingold 1988).

 

잉골드의 최근 저술에서 극지방 사냥꾼이 중심적 비유점(central figurative point)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사냥꾼은 ' 찾기(pathfinder)' 전형이라 있다. 이는 이야기제작자(story-maker)이자 이야기꾼(storyteller)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제작자(maker of history) 있다. 또한 환경 속에서 의도적인 인간 행동자(purposeful human actor) 상징한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특정한 사회 형성, 그리고 초기 역사 시대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극지방 사냥꾼의 삶을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달리, 그의 최근 저술에선 사냥꾼의 존재(being) 또는 되기(becoming) 초기 또는 최근의 인간 존재 형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잉골드의 설명대로라면, 인류학 연구에서 비교(comparison) 일반화(generalization) 필요성과 관련해야 이러한 전환―예술로서 현대 인류학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부분―을 이해 있다. 잉골드는 2차대전 이후 문화 분석에 대한 상징적 접근과 문학적 접근이 드넓게 증가한 , 그리고 문화 세계를 내부에서만 이해할 있다며 이를 특수하고 진정성있다고 보는 사상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잉골드는 최근 일반화의 필요성―현대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과 분리된 에스노그라피의 개념에 대해 참혹한 비판을 시작했다. 그는 다르시 톰슨(D'Arcy Thompson) Growth and Forms』을 언급한다. 톰슨은 생물학적 세계에 대한 수학적 이해를 위한 강력한 주장을 전개하는데, 반면 여기에는 베르그송 생기론(Bergsonian vitalism) 사상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잉골드는 좋은 서술 작업(descriptive work) 위한 도구 뿐만 아니라 야심찬 일반화 수행의 약속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인류학적 과학의 지적이고 계보적인 과거에 보다 충실하게 맞서자고 간청한다. 우리는 잉골드의 이런 간청(plea) 그의 조응(correspondence) 언어로 이해할 있을 것이다. 일반화하는 과학으로서 인류학에 대한 선호를 설명하는 것보다도, 간청은 ―스노우(C. B. Snow, 1961) 표현대로― 과학의 문화, 그리고 예술의 문화 분업을 초월하는 인류학의 독창적인 이중적 정체성(duplex identity) 대한 일깨우는 부름(awakening call)으로 기능하다.

 

 

6.

마지막으로 극지방 초원 사냥꾼에게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언급한 것처럼, 잉골드 사상의 근저 같은 곳이다. 깁슨(Gibson, 1966) 그가 말하는 심각한 주거 사업(serious business of living)―이는 움직임 건설된 환경(built environment) 대한 인식의 변화로 정의된다―에 대해서 쓰고 있다. 전통 서양미술이 상정해 정적이고 수동적인 관람객(static and passive spectator) 개념에 반대하며, 깁슨은 환경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이동성을 강조했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위치를 바꾸면 이미지가 바뀐다(shift your position and you alter the image)'(Gombrich, 1982: 197에서 재인용).
잉골드는 인간의 인식에서 운동의 중심성(centrality of movement) 상세히 설명하고, 참여의 미학으로 알려진 깁슨의 생태 심리학(ecological psychology) 그리고 예술 철학의 관련 사상 흐름을 참조해, 생태학적 실천 이론(theory of ecological practice) 발전시킨다.  그의 핵심 관심사는 '인간의 개념에서 정적이고 사물 같은(static and thinglike) 모든 배제하는 '이다(Ingold, 1986: 342).
잉골드는 초원의 사냥꾼―그는 실용적이고 관습적인 운동의 여정(itinerary of his practical, habitual movement)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관점 구조(a continually changing perspectival structure)'에서 환경의 윤곽(contours of the environment) 발견한다―같이 의도적인 인간 주체의 이동성(mobility of the purposeful human subject) 초점을 맞추고 있다(Ingold, 2000: 226~228). 그는 메를로-퐁티(Merleau-Ponty) 인용하면서, "객체에 고정된 관점을 갖는게 아니라, '객체를 고정된 상태로 유지하면서 관점을 달리하는 '으로 관찰(observation) 구성(consists)된다고 주장한다(Ingold, 2000: 226).
그래서
그는 ―예를 들며, 어딘가에서(from somewhere) 아니라 어디에서든지(from everywhere) 본다는 점을 통해― 인간이 그들의 살아있는 집에 대한 관점(view of the living house)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비록 짧은 요약들이 잉골드의 복잡한 공식화(complex formulation)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냥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잉골드로부터 인간 개인이 어떻게 실용적이고 이동적인 행동(practical, mobile actions) 통해 세상을 발견하는지를 배우지만, 그의 공식화는 이러한 이동 활동(mobile activity) 변화하는 관점(shifting views)―교환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 of exchange) 배경에서 발생하는― 고려하지 않는다.
극지방 사냥꾼이 반드시 고독한 행동자(solitary actor)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그를 특징짓는 방법이다. 그의 생명을 빼앗는 행동(life-taking action) 의미론적으로 반대되는 행동들―배우자의 임신 실천 같은 것―과 상징적인 소통에서 진행될 있다. 성공적인 사냥(successful hunt) 전통적으로 성공적인 유혹(successful seduction)―사냥감(game animal) 직면한 포식 행위(act of predation) 주술 수단(magical means)으로 유혹한 걸로 보도록 하는―을 수반하는 , 이는 극지방 사냥 사회 전반에 널리 관찰되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냥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동일한 행위(남성과 여성 사이의 동일한 행위) 대한 상반된 관점의 교환을 포함하는 의식화된 행위이다(Brightman 1993; Devisch 1993, 123; Tanner 1979; Willerslev 2007). 시베리아 극동 사할린 북부의 원주민 오로촌(Orochon) 사냥꾼들 사이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사냥 실천은 매우 협력적이고 부부적인 활동(collaborative, conjugal activity)이었다. 남자들이 사냥감을 찾아 숲에 나가 있는 동안, 아내들은 집에서 보통 인격화(anthropomorphic) 형태로 만들어진 자신들이 아끼는 나무 조각(cherished wooden carvings)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며 그들 나름의 사냥을 했다(Kwon, 1998: 119). 체계에서 남성 사냥꾼이 먹이를 발견한 것은, 집에서 여성 사냥꾼이 동물을 성공적으로 설득해 인간 사냥꾼에게 자신을 드러내도록 것과 같은 의미였다.
결국, 조각들은 샤먼―강력한 토템 속성(totemic property) 지닌 실체인 신화와 의례(myth and ritual)에서 곰의 정신(spirit)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는 뒤르켐의 용어로 집합 표상(collective representation)으로 설명될 있는 극지방 전역의 감각이라 있다(Hallowell, 1926; Kwon, 1999: 385387).

 

이러한 삽화(vignettes) 사냥이 겉으로 보이는 이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경 고독한 행동자라는 것과 달리, 인간 사냥꾼은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자이다. 겉보기엔 고독한 포식 행동은 사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모두의 사회학적 의미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샤먼이 만들어준 부적에게 노래하는 것이 성공적인 사냥에 필수 요소라는 사실은 애니미즘 이론이 강하게 대표하는 개념, 동물이 인간과 똑같이 다른 존재들과 소통할 있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이는 또한 사회적 힘의 작용(work of social forces)―뒤르켐이 토테미즘에 관심을 갖게 지점―을 수반한다.

부부 관계의 관점에서, 사냥의 주체성(subjectivity of hunting) 안에 사회의 자의식적 집합 자아됨(society's self-conscious collective selfhood) 내포할 뿐만 아니라, 부부 조직이 기원을 두는 다른 모임들(other societies) 교환하는, 사회의 교환 관계에 대한 역사도 담고 있다. 점에서 ,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은 개별 등기(separate registers) 나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있다. 그리고 인간-동물 상호작용(humananimal interactions)라는 분야가 수도 있다.

 

뒤르켐은 애니미즘적 질문과 토테미즘의 이슈가 공존하고 공행(coexistent and coactive)하는 (field) 무시했다. 애니미즘에 대해 오늘날 되살아난 관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현실, 그리고 관련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애니미즘이 반드시 토테미즘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뒤르켐이 사회적 통합과 집합 표상의 문제라고 설명한 것과도 애니미즘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와 유사한 관찰은 잉골드의 생태인류학에 적용할 있는데, 중요한 의미에서 애니미즘의 자연 철학은 타일러가 이해한 방식보다 훨씬 급진적인 의미에서 적용할 있다. 타일러에게 애니미즘은 자연적 종교(natural religion) 구성하는데, 이는 '-도덕적(un-moral)' 종교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훈육하는 경향―모든 선진 세계 종교 형태에 존재하는―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르켐은
타일러의 이러한 움직임(move)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뒤르켐에게 있어, 인간 존재에 대한 과학(science of human beings)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이 되어서(becoming social) 인간이 되는(become humans)지를 탐구해야 했다. 그에게 사회는, 도덕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 동등하며,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함께 살고 일하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집합 현상(collective phenomenon)이다.
애니미즘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전통을 교육받은 잉골드는 세대 대부분의 인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으로 돌아간다. 그는 애니미즘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제거해버리면서, 애니미즘의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이를 인류의 공유되고 원초적이고 잊혀져가는 삶의 양식(mode of life) 조망(vista)으로 환경과 함께 바꾸어버리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애니미즘으로의 회귀(return to animism) 과학에서 예술로, 그리고 다시 과학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잉골드 사상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면, 대단히 창조적인 움직임은 현대 인류학의 토대를 뒤흔들 것을 약속한다. 약속하는 것엔 세기 토테미즘 혁명에 이은 사회 이론의 역사에 다른 혁명에 다름 아니다. 이는 애니미즘이 세기 동안의 무명을 떨쳐내고, 마침내 그것의 완전하고 진정한 이론 잠재력을 발휘할 있는 기회를 주는 혁명이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위 포스트-휴머니스트(post-humanist) 혹은 포스트-인간중심주의(post-androcentric) 시대에 대한 숙구에 많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흥미진진한 움직임과 관련해, 개인적인 희망은 궤적을 따라 애니미즘 철학과 토테미즘 사회학 사이의 공동 행동(joint actions) 많이 보게 것이라는 점이다.
애니미즘으로의 회귀가 토테미즘으로부터 비판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라기보다, 창조적인 토테미즘으로의 회귀가 되기를 희망한다. , 극지방 사냥꾼의 사냥 정신(the spirit of the hunt) 다가가는 말이다.

 

감사의

2009 알랭 카이에(Alain Caillé) 키스 하트(Keith Hart) 공동최한 마르셀 모스 기념 컨퍼런스(Marcel Mauss Memorial Conference)에서 '현대 학계에서 애니미즘으로의 회귀' 대한 나의 초기 생각을 발표했었다. 그레고리 델라프라스(Gregory Delaplace) 사려 깊은 논평은 이번 글을 수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Webb Keane) 윌리엄 메카시(Willard McCarty)에게도 따뜻한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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