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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으로 논문자격시험 페이퍼를 준비하다가,
vitalism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깊게 고민한 브라질 인류학자가 있었다.
HAU 저널에는 2018년 life 논문들도 실려 있었으니,
내가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리딩하면서, 초벌 번역을 한 걸 공유한다.
생동론과 인류학은 얽혀있다... 들러붙어있다...랄까...
무위당 장일순의 생명사상을 어떻게 인류학으로 풀어낼까 고민하다가,
단초를 잡은 거 같다. 기쁘면서도 좀 두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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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류학에서 생동론의 생동 : 삶의 늘푸른 나무를 갈망하며
루이즈 FD 두아르테
DUARTE, Luiz FD., 2020, "The vitality of vitalism in contemporary anthropology: Longing for an ever green tree of life", Anthropological Theory, 21-2: 131~153, (https://doi.org/10.1177/1463499620923546).
초록
이 글은 서구 문화에서 '삶'에 대한 우주론적 개념을 우리 시대로 옮겨온 선들을 밝히고, 이 궤적이 현재의 철학적, 인류학적 사유를 어떻게 조명하는지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8세기 생동론은 유동성, 총체성, 변증법, 그리고 자연과 문화 또는 사물과 사람의 배태성 보존에 대한 광범위한 낭만주의적 강조와 함께, 자연과 삶의 현상에 대한 주요 논의 장이었다. 내 주장의 핵심은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으로서의 삶, 그리고 생동 조건에 대한 우주론적 개념을 구별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개념들의 긴 역사와 현재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맥락화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삶의 황금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Geothe, 1986 [1808]).
"반대되는 느낌, 나무의 뿌리에서부터의 안녕, 완전히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하나의 유산, 꽃과 과일의 운반자, 그리고 그 존재에서 정당화될 준비가 된, 그러한 이유로 인해 과거로부터 출현하는 것에 대한 행복 ―이것이 우리가 현재 바람직하게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Nietzsche, 1874).
들어가며[1]
지난 10년 동안, 가족, 종교, 성격에 관한 나의 연구는 '자연' 개념에 대한 증가하고 체계적인 관심을 요구해 왔다. 현대 서구 문화의 이 근본적이지만 확산적인 차원은 인문학의 학문적 조직에서 많은 꼬리표 아래 나타난다. 실재의 다른 우주론적 개념들, 특히 특정한 존재론적 체계들을 비교해야 하는 거대한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자연의 인류학(anthropology of nature)'은 민족학의 영역에서 그것의 영향력을 확장해오고 있다. '자연(nature)'을 고려할 때, '삶(life)' 개념이 바로 싹튼다. 인간의 '자연'이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는 무생물(inanimate)과 생물(animate)의 절반인 우주 사이의 경계들에 대한 축소할 수 없는 서구의 관심에 있다.
최근 일련의 출판물들은 지식인들 사이의 현대적 논의에서처럼 일상적 경험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삶'의 개념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전개되고 있다. 첫 번째 더 사회학적 경향은 미셸 푸코의 통치성과 생명정치에 대한 선구적 공헌에서 비롯되었다(Foucault, 1977, 1985; Esposito, 2011; Rose, 2001). 두 번째 현상학적, 존재론적 경향은 서구의 '자연', '몸', '고통', '인격' 개념을 수정하면서 민족학적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다(Das, 2018; Fassin, 2018; Jackson, 2018; Pitrou, 2014a, 2014b; Pina Cabral, 2018; Schremp, 2018; Singh, 2018).
여기서 나의 목표는 세 번째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서구 문화에서 생명의 우주론적 지위를 우리 시대로 인도하는 계보를 밝히고, 이 궤적이 철학적, 인류학적 사유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비추는지 배울 생각이다. 생명의 개념은 고전 의학-철학적 전통과 기독교 우주론의 먼 뿌리에서 유래하고, 비교적 최근의 현대 생물학과 낭만주의 철학의 등장에 영향을 받아 보편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따라서 생명의 긴 역사와 현재의 복잡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어렵다.
최근까지 인간의 삶은 거의 필연적으로 '피(blood)'과 연관되어 있었다. 피은 동물 유기체의 신체적 재생산과 유지, 인간 경험의 도덕적 조건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서양의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그것은 가족, 세대, 도덕성, 성별, 재생산,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서양 친족(kinship) 체계의 이념적 기초인 인척(consanguinity)의 '자연적' 조건을 나타냈다(cf. Dumont, 1971). 피를 생명과 정체성의 소재지로 'DNA'로 대체한 것이 이제는 널리 퍼져 있다. DNA가 전통적인 혈액의 감각을 그렇게 광범위하게 구현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변화는 삶의 조건과 특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 현대 과학의 영향력의 징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이 생명체에게 도덕적 함의를 완전히 박탈한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의 진화는 피의 마법적 상징성의 느린 붕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 속 (종종 '사랑(love)'과 '지혜(sublimity)'라는 미명 하에) 피와 삶을 엮어서(enmeshed) 확립된 표현 형태에 대한 광범위한 예술적 투자와 병행했다(Palti, 2005). 그러한 이미지는 초상화, 풍경, 정물화 또는 풍속화, 감상적인 시 또는 자연주의 산문, 오페라 또는 기악곡에 나타난다.
과학 자체가 면역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낭만주의 사상은 18세기 말 이후 과학적 발전에 스며들었다(permeated). 독일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 자연에 대한 낭만철학)은 예술과 느낌으로 과학적인 노력을 연합하기를 희망하는 사상가들을 참여시켜서 객관성과 주관성을 일치시켰다. 삶의 개념은 낭만주의 과학의 영구적인 초점이었고 현대 인간 과학의 초기 발전을 자극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삶(루소, 토크빌 혹은 르본), 혁명적인 폭발 속에서 분출되는 삶(해석학파), 고전적이고 정준적인 텍스트의 철저한 돌출으로부터의 삶(훔볼트 또는 헤더), 서구가 아닌 언어와 문화 속에서 맥동하는 삶(프로이트), 감춰진 무의식에서 밀려나오는 삶으로 구분했다.
물질주의 과학에 내재한 이전의 기계론적 모델과는 달리, 낭만주의 과학에서 나타난 도전 중의 하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living creatures)의 '유기적(organic)' 표현을 구상하는 것이었다. 18세기 말, 생물학과 의학의 경계에서 마침내 '생동론(vitalism)'이라는 운동이 등장했다. 낭만주의가 과학을 더 큰 규모로 변화시켰음에도, 생동론은 저항했고 또한 전통적인 물질적 지혜를 알려주었다. '감성(sensibility)', '경험(experience)', '영향(influence)'과 같은 범주들이 물질주의와 생동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초기의 인간 과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Gusdorf, 1984; 1985). 낭만주의와 강하게 유사한 관점들을 포함하는 것 외에도, 상식적 개념(common-sense notion), 철학적 범주(philosophical category), 과학적 개념(scientific concept)으로서의 삶의 역사는 모두 생동론 운동의 측면들을 주로 반영한다.
삶과 자연에 관한 연구
만일 어떤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해석이 그것의 특징적인 복잡성, 긴장 및 갈등을 노출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규모 사회, 즉 '문명의 문화' 또는 '세계 종교'에 대한 분석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학 사상의 내적 작용이 전적으로 인류학이 원래 꽃을 피웠고 그것이 계속 번성하는 문화의 내적 작용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cf. Duarte, 2015). 이것은 장애가 아니라 도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해와 경험의 모든 표현들의 보편적인 비교에 기초한 인류학의 특징적인 추진력을 따라, 서구 문화에서의 삶과 자연에 대한 연구는 더 많은 인식이 필요한 분야들 중 하나이다. 역사학, 사회학, 철학의 영역에서, 복잡한 대규모 문화들에 관한 이러한 비교적 노력의 중요한 예들은 막스 베버, 마르셀 그라넷, 조르주 뒤메질, 장 피에르 베르낭, 미셸 푸코의 작업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인류학에서, 그러한 특정한 의미에서, 주로 루이 뒤몽(Dumont, 1972)과 마샬 살린스(Sahlins, 1996)로부터 나의 영감이 온다. 서구와 같은 복잡한 이념 체계에 대한 나의 분석과 관련된 이념적인 축들 중에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대립은 특히 중요하다(cf. Duarte, 2004), 스티븐 루크스(Lukes, 1973), 이사야 벌린(Berlin, 1980), 조지 구스도르프(Gusdorf, 1972; 1982; 1985), 루이 뒤몽(Dumont, 1991)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전된 상식적인 단서들을 따른다.
낭만주의적이고 생동론적인 사고 안에서의 삶의 가치, 인간과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어온 개념은 다른 것들보다 더 명확하게 특정 경향이나 학파들에 영감을 주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에 이르는 일련의 전형 아래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 두드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몸(body)과 그 영향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아있는 경험을 선호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를 비난하는 성향을 공유한다. 그들은 낭만주의 의제의 부활에서, 강도(intensity) 대신 확장(extension) 그리고 행동의 상해(detriment)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에 대한 강조를 개탄한다.
삶에 집중한 대부분의 최근 연구는, 말하자면 에스노그라피에 열려 있는 사회학적 또는 현상학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삶을 세계,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인 인간 경험인 '존재(existence)'로 다룬다. 인간 경험의 구체적, 물질적, 행동적 차원에 대한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t)의 특징적인 강조는 필연적으로 생물학과의 대화의 더 넓은 영역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정신분석학이 신경과학적 야망으로부터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과 기술이라는 새로운 인류학의 성장은 이 과정의 징후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문화적 구성에 대한 전형적인 인류학적 분석으로서, 즉 삶을 자기-설명(self-explaining)적인 블랙박스로 불러들이는 것은 우리의 의미 있는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비이성적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서구 우주론에 대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드문 접근처럼 보이지만, '삶'이라는 용어의 사용 조건은 우리 사회에서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포함한다. 삶은 인간의 즉각적인 경험, 또는 그 생물학적 기반을 탐구하는 모든 새로운 연구 영역의 핵심에 놓여 있다.
생동론의 원형
"생동론은 물리적 결정론의 죽은 메커니즘(mechanisms)과 반대되는 것으로, 낭만적 이해(romantic understandability) 가능성의 기초가 된다"(Gusdorf, 1984: 435).
결국 '생동론(vitalism)'라고 명명된 관행과 사상이 18세기 유럽 초기에 등장했을 때, 일련의 출처들이 이 운동과 연관되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고전 고대로부터 흘러온 우주론적 지식의 전통적인 배경이었다. 때때로 '우주생물학(cosmobiology)'이라고 불리는 의학-철학적 전통의 총체적인 기초는 연금술(Pigeaud, 1981)과 존재의 거대 사슬(Lovejoy, 1993)을 포함한다. 기독교 우주론으로부터 나온 것도 많았다. 이러한 측면들은 육체와 영혼 사이의 긴장, 세상에 신성의 주입,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한 인류의 구원에 대한 희망(Brown, 1982)을 포함한다. 두 가지 신비로운 전통이 공식에 기여했다.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와 야콥 뵈메 (Jakob Böhme, 1575~1624)에 의해 부활된 마이스터 에크하트(Meister Eckhart, c.1260~c.1328)의 독일 중세 신비주의, 그리고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와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신비주의, 생리학자 반 헬몬트(Van Helmont, 1580~1644)와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가 직계 후임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natura naturans', 'conatus', 'vis viva' 그리고 범정신론(pan-psychism)의 개념과 관련하여 기여했다(Gustorf, 1985).
우주 안에서 독특한 삶의 특성을 강조하는 생동론은 동시대 낭만주의의 기본적인 신조(tenets)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차이점은 대부분 두 운동 모두의 범위에 있었다. 생동론은 초기 현대 생의학 내에서 발전한 반면, 낭만주의는 예술, 철학, 과학에 스며들어 계몽주의적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반대로 발전했다.
생동론의 삶에 대한 초점은 총체성(totality), 운동(movement)과 유동(flux), 경험(experience)과 주관성(subjectivity), 충동(impulse)과 추동(drive)의 특성을 포함했다. 이 요소들은 또한 전체의 우위에 대한 낭만적인 개념, 퍼져있는 우주적 정신(cosmic permeating spirit, Geist), 어디에나 있는 기묘한 힘(omnipresent singularizing force, Bildung and Kultur), 그리고 부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재적 성향(intrinsic disposition to rise and move forth, Aufhebung and Trieb)에도 필수적이었다(Duarte, 2004; Gusdorf, 1982). 자연철학 안에서 이 프로그램들은 함께 작동했다. 생동론의 가장 훌륭한 현대적 해석가 중 한 명인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구스도르프(Georges Gusdorf)는 이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G. E.] 슈탈의 생동론은 메커니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의 추동이 특별히 다르게 나타나는 더 넓은 현실에서 기계적 시스템을 삶의 영역에 통합하는 것만을 의도한다(Gusdorf, 1972: 611).
원래 버전에서, 생동론은 세 가지의 필수적인 초점을 통합했다: '유기체'의 상태, '신경계'의 특성과 효과, 질병과 치료 자원 사이의 관계. G. E. 슈탈(Stahl, 1660~1734)은 특정한 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삶의 총체성(totality of life)의 한 단위인 유기체(organism)에 대한 생각의 선구자였다.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와 알브레히트 폰 할러(Albrecht Von Haller, 1708~1777)는 첫 번째 경우에 뇌와 신경계에 대한 지식, 특히 신경 경험의 물리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특성을 발전시켜 마음과 뇌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했고, 두 번째 경우에 새로 기술된 감성과 과민성의 특성을 탐구했다(cf. Duarte, 1986; Figlio, 1975; Lawrence, 1979). 사무엘 하네만(Samuel Hanemann, 1755~1843)은 동종 요법으로 알려진 인간 유기체와 자연 세계의 '생동 원리(vital principles)'에 의존하는 치료 체계의 가장 체계적인 지지자였다.[3]
가장 이른 시기의 논쟁에서 본질적인 것은 현대 발생학(modern embryology)의 출현을 이끈 존재유전학적(ontogenetic) '발달(development)'에 대한 논쟁이었다. 전형성주의와 후성유전학은 성숙한 형태를 달성하는 데 겪은 변형의 모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전형성주의(preformationism)는 완전한 유기체의 원래 미시적 모델의 점진적 성장으로서 발달을 구상했다. 후성유전학(epigenesis)은 개별(individual) 생명의 근원이 생명 과정의 조건과 경험과 관련하여 점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했다(cf. Cangguilhem et al., 1962; Silva and Duarte, 2016).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s)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증가는 또한 치열하게 논의되었고, 종종 그 시기에 생명력과 생명과정(life forces and processes)에 대한 설명과도 얽혀 있었다(Gustorf, 1985; Palti, 2005).
생동론과 낭만주의를 이해하려면 괴테(Goethe, 1749~1832)의 업적, 특히 색채론(Farbenlehre, 1993[1810])을 참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연구에서, 색에 대한 주관적인 감각 경험은 기계론적인 뉴턴의 빛 물리학에 도전했다. 괴테는 살아있는 경험(lived experience)에 대한 관심이 추상적인 계획보다 우선하는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절합(articulation)을 제안했다.
구스도르프의 생동론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자연철학과 철학의 우주에서의 삶의 지위에 대한 광범위한 야망을 강조한다. 이 운동은 우주와 통합된 의료인류학, 즉 종합의 과학과 과학의 종합의 과학이었다(Gusdorf, 1985: 260). 셸링(Schelling, 1775-1854)은 '초월 의학(superior medicine)'을 제안했는데, 이는 '세계 유기체(world organism)'(Gusdorf, 1985: 267)의 작용에서 자극성(Von Haller)과 유기체(G. Stahl)의 원리를 다루는 유기적 특성(organic nature)의 일반적인 과학(Gusdorf, 1985: 262)이다. K. F. 부다흐(Burdach, 1776~1847)의 연구에서 생동론은 '보편적 유기체(universal organism)'에 대한 인식과 유기체가 일종의 신비한 신체인 '소우주의 생리학(physiology of the microcosm)'을 포괄하는 범정신론(pan-spiritualism)이었다(Gustorf, 1985: 271).
생동론에 대한 푸코의 공명은 독특하다. 선언하길, 모든 선행자들이 '삶의 위대한 창의적인 힘, 변형의 무한한 힘, 가소성, 그것이 모든 생산을 포괄하는 흐름을, 어느 누구도 그 주인이 되지 않던 시대에 우리 자신이 포함된 것을 보았다'고 했다(Foucault, 1966: 144). 게다가, 당시에는 '삶(life)' 자체는 없고, 오직 자연사에 의해 조직된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s)'만이 있었다고 푸코는 덧붙였다(Foucault, 1966: 145). 그 후, 삶은 자연 분류(natural classifications)에 관한 자율성(autonomy)을 가정했다(Foucault, 1966: 225): '영구적으로 분석 가능한 표현의 공간에서 나타났다; 삶은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힘의 수수께끼로, 표현하고 유지하기 위해, 여기 저기에 있는, 그것의 노력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Foucault, 1966: 294). 그는 계속해서, '퀴비에(Cuvier) 이후부터 살아있는 존재는 적어도 언뜻 보기에는, 신체적 실체의 일반적인 법칙을 배제한다; 생물적 존재(biological being)는 지역적(regional)이고 자율적(autonomous)이 된다; 삶은, 그것에 외부적인 것인 존재의 한계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나타난다'(Foucault, 1966: 295).
계몽주의 과학과 낭만주의 과학을 특징짓는 이분법은 교류와 영향이 양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의 중요한 발전에 영감을 주었다. 새롭게 등장한 인간과학은 자연철학(Naturphilosophie)과 철학(Lebensphilosophie)에서 해석학(hermeneutics)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중에 현대 현상학(phenomenology), 신생동론(neo-vitalism)와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연구자와 철학자들 사이의 삶의 감각(sense of life)에 관한 대화에 의존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공헌
"살아있다, 고로 생각한다"(Nietzsche, 1874: 94).[4]
니체(Nietzsche, 1844~1900)는 원초적이고 동시대적인 생동론과 낭만주의 사이의 주요 철학적 경첩으로 여겨진다. 생동 없는(devitalized) 사고와 문화에 대한 반대로, 위의 유명한 표어(epigraph)에 표현된 것처럼, 그의 강력한 영향력과 비판적인 기여는 삶의 절대적인 가치를 20세기로 끌어올리는 것을 도왔다. 『비극의 탄생(Birth of Tragedy, 2008[1872])』에서, 그는 그리스 우주론의 아폴론적인 차원과 디오니소스적인 차원 사이의 고전적인 이분법을 디오니소스적인 컬트에 의해 구현된 삶의 원초적인 힘에 대한 역사적인 기념물로 다시 정교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원초적인 힘들은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와 기독교적인 '노예 도덕(slave morality)'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5]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불편성'에 초점을 맞춘 『불시의 고찰(Untimely Considerations)』 중 첫 번째 것은 니체의 삶에 대한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고, 삶을 억압하는 왜곡된 결과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고대사'는 현재의 신선한 삶이 더 이상 그것에 영감을 받지 않을 때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저 모호하고, 노력하며, 자기 자신을 갈망하는 무정한 힘'(Nietzsche, 1874: 30). 니체가 말하는 삶에 대한 개념의 한 축은 경험의 총체성(totality of experience)이며, 자기-주장(self-assertion)의 영구적인 상태에서 모든 수준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내재이다. 그의 관점에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포괄적인 분위기, 완전히 신비로운 아지랑이를 필요로 한다; 종교, 예술, 천재, 그것의 포장을 박탈할 때, 대기가 없는 행성처럼 빙빙 도는 것은 종교를 비난할 때, 예술, 천재, 즉 그것이 빨리 척박하고, 뻣뻣하고, 결실이 없다면 놀라지 말아야 한다'(Nietzsche, 1874: 61).
낭만주의적으로 볼 때, 그 총체성은 또한 원시적인 단일성, 즉 역사의 과잉, 신선한 생명의 결핍에 의해 위협받는 우주(Ureins)의 본래적 통일성이다. '디오니소스적 주문에 의해 사람들 사이의 결합은 새롭게 강화되고, 자연 역시 부정되고, 불친절하고, 가라앉은 채로, 잃어버린 (원형; prodigal) 아들인 남자의 귀환의 향연을 축하하기 위해 돌아온다. 자연은 그 선물을 전시하고, 산과 사막의 짐승들을 평화롭게 모은다'(Nietzsche, 1874: 31).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에 나오는 '사랑의 죽음(Liebestod)'를 반향하면서, 니체는 '두려움과 연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창조적인 즐거움(procreative enjoyment)으로 융합되는 살아있는 하나로서 행복한 살아있는 사람들이다'(Nietzsche, 1874: 102–103)라며. 개별성을 거부하고 삶을 더 깊게 하는 사랑의 무한한 능력을 찬양한다. 문화는 자연에 도전하지 말고, 명백한 진정성을 찾아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 '삶, 생각, 외모와 의지 사이의 일치로서 내부와 외부가 없는 새롭고 향상된 물리학으로서 문화 [빌둥]의 개념.'(니체, 1874: 99).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고찰, 그리고 동시대의 생의학적·인류학적 사유의 조건, 그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삶의 악화(perversion of life)에 대한 비난은 니체의 퇴화에 대한 비난과 유사한 방식으로 퇴화 구성(degeneracy configuration)의 기초가 되었다. 퇴화 이론(theory of degeneracy)은 19세기 후반에 중요성이 커졌다. 그것의 기본적인 신조는 현대와 관련된 일련의 '악(vices)'과 '악화(perversions)'가 라마르크식(Lamarckian manne)으로 계승되고 쇠약해진 집단적 조건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다음 세기 초, 그것은 나치즘과 같은 공격적인 반동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이데올로기의 성장을 지지했다. 자연에 가까운 순수하고 깨끗한 삶에 대한 숭배는 그 버전의 생동론의 현재 특성이었다.
퇴화라는 단어 자체는 니체의 텍스트에 등장한다. 그 이유가 같진 않지만, 진단은 병렬적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모든 작품에 체계적으로 등장하는 삶의 힘(powers of life)에 대한 호소는 이성과 객관화된 문화의 위험을 공격적으로 비난했다: '진리를 퍼뜨려라, 삶이 사멸할지라도(Fiat veritas, pereat vita)'(Nietzsche, 1874: 134). 이것은 현대의 생동론적 사유, 생명 숭배(cult of life)의 긍정적 버전(생태학적 이념, 존재론적 인류학, 뉴에이지 운동 등), 또는 '올바른 생명(correct life)' 가치의 파괴에 대한 부정적 보수적 비난(퇴화적 신조를 상기시키는) 둘 다에서 볼 수 있는 영구적인 좌우명임이 입증될 것이다.
근래의 생동론
"근래의 신생동론는 낭만주의의 회귀를 헌납하면서, 낡은 교조와 원칙이 아니라, ―누구의 권위를 생각해내던― 결정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총체적 인간 현상의 권리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Gusdorf, 1985: 374)
하드 사이언스(또는 적어도 그 경계에서) 영역 내에서 번성하고 그것의 현대 인식론에서 더 광범위하게 반향을 일으킨 하나의 최근 생동론적 경향은 '자연주의 생동론(naturalistic vitalism)'이라고 불릴 수 있다. 한스 드리스치(Hans Driesch, 1867–1941)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현대 생동론자일 것이다. 중요한 실험생물학자인 그의 성게 실험에서의 예상치 못한 결과 이후 생동론으로의 전환은 종종 생동론 문헌에서 인용된다(cf. Cangguilhem, 2009 [1968]; Silva and Duarte, 2016).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근친상간 분류를 부활시켰고 그것을 그의 형태유전학 연구의 중심에 놓았고,[7] 『유기체에 대한 과학과 철학 (Science and Philosophy of the Organism, 1908)』은 20세기 초 생동론의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삶이 주는 현상(life-giving phenomena)에 대한 배태된(embedded) 인식을 향한 공통된 전념을 감안할 때, 칼 융(Carl Jung; 원형, 동시성 또는 'anima mundi'에 대한 그의 이론), 요하네스 라인케(Johannes Reinke; 그의 도미넌트 이론), 야코프 폰 우엑스퀼(Jakob von Uexküll; 음웰트에 대한 그의 이론), 그리고 프리조프 카프라(Fritjof Capra; 전체론 또는 체계 패러다임)만큼 다른 작가들은 이 경향의 일부로 고려될 수 있다.
생물기호학(biosemiotics; as T. Uexküll labels the trend)에서 생동론의 한 형태를 식별할 수 있다. 정보 이론, 사이버네틱스, 시스템 이론 및 기호학 이론 분야에서 활동하는 훔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이를 그들의 자기생성(autopoiesis) 이론에서 논한다.[8] 이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후기 연구, 특히 그가 '연결되는 패턴(the pattern which connects)'이라고 불렀던 연구에서도 나타난다.[9] 엄격한 훈련과 전통적인 과학에서 인정받는 위치에서,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는 '형태발생학 필드(morphogenetic field)'와 '형태적 공명(morphic resonance)'을 중심으로 하는 복잡한 이론 체계 내에서 이종적 주제(heterodox themes)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전향했다.[10].
이 모든 기여들에서 공통적인 특징은 어떤 종류의 전체 내에서의 관련성에 대한 강조,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명확한 구분의 불가능성, 또는 개별적 부분에서의 인식에 대한 강조이다. 삶은 지배적인 힘 또는 조건들에서의 배태성(embeddedness)을 포괄하는 이것에 대한 이름이다.
각기 다른 용모와 상이한 이유로 생동론과 낭만주의로부터의 특정한 영향은 '인간과학'의 출현에 필수적이었다. 마르크스(K. Marx), 토크빌(A. de Tocqueville), 타일러(E. Tylor), 딜타이(W. Dilthey), 분트(W. W. Wundt), 타르드(G. Tarde), 베르그송(H. Bergson), 베버(M. Weber), 뒤르켐(E. Durkheim), 말리노브스키(B. Malinowski)의 작업에서 그 존재를 추적하는 것은 흥미롭다. 각각 특정한 개념의 공식화에서 생동론의 특징을 제시하지만, 항상 표준적인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와 긴장 관계에 있다. 여기서 나는 생동론의 제시가 내재적이고 '문화적 생동론(cultural vitalism)'을 구성하는 저자들에게 집중한다.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유용한 출발점이다. 당대 사회학자와 인류학자의 작업과는 달리, 대부분의 인간 현상 분석에서 삶의 가치와 그 핵심 역할은 그의 작업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회학 이론에 대한 일련의 발견주의적 기여에서 이 설명할 수 없는 총체를 더 명확하게 개념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명성 있는 '객관적' 문화와 '주관적' 문화, 또는 '양적' 문화와 '질적' 개인주의 사이의 반어들은 그런 점에서 분명하다. '주관적' 문화와 '질적' 문화의 우월성은 각각의 반대에 없는 살아있는 특성(living qualities)이란 현존 때문이다. 주관적 문화는 인간 경험에 내재적이고 즉각적인 관여로 맥동하는 반면, 질적 개인주의는 이동성, 자기-표현, 창의성으로 이끌리는 현대 주제에서 내적인 질의 발달을 허용한다. 두 경우 모두, 유동(flux)과 변화(change)는 영원한 현대적 지양(Aufhebung)의 필수 조건이다.[12]
'형태(form)'와 '삶(life)' 사이의 대립은 심멜 변증법의 기초이다: '우주적이고 일반적이며 단일한 현상으로서 삶은 그러한 연속적인 흐름이며, 형태에 대한 심대한 반대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Simmel, 1971: 433). 삶은 형태에 의존하지만, (정신[Geist]이 육체에 의존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것을 초월하여 정신적 특성(spiritual quality)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
"(…) 삶은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가변적이다.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발전하고 있다. 그 형태들을 형성하면서도 계속 깨뜨리고 있다. 지속적이면서도 앞으로 돌진한다. 주관성 속에서 빙빙 돌면서도 사물과 사물 위에 객관적으로 서 있다. 이 모든 대조들은 단지 그 형이상학적 사실의 사례들일 뿐이다. 삶의 가장 내면에 있는 본질은 그 자체를 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능력, 즉 그 자체를 넘어서서 손을 뻗어 한계를 설정하는 능력이다"(Simmel, 1971: 431).
짐멜에서 삶은 분명히 낭만적인 방식으로 정신과 분리할 수 없지만, 어떤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생동론적 가설에 내재한 것은 아니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생동론적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자연 그 자체에 관심이 없다. 문화/만듦(culture/Bildung)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자체의 초월성으로서 삶의 본질'이라는 사회적 응집력과 일관성의 형태들 내에서 발전하는 독특한 삶의 특성(quality of unique lives)인 문명과 현대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자연과학자로 자랐고, 자연에 대한 연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뛰어난 해석을 보고, 나는 '자연주의' 생동론자가 아닌 '문화' 생동론자에 그를 포함시킨다―비록 그는 이것을 단순한 이분법이라고 비난하겠지만.[13] 총체성(totality)은 그의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이다. 그의 형식 총체성(formal totality)은 대칭성(symmetry)과 아름다움(beauty)의 개념들을 포함한다: '스타피쉬, 말미잘, 삼나무 숲, 그리고 인간 집단(committees)을 묶는 접착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더 넓은 앎' (베이슨, 1980: 3).
관련(relatedness), 즉 '연결하는 패턴'은 그 형식 총체성 안에 있는 구조이다. 형식성과 아름다움은 같은 현상이다: '미학적으로, 연결하는 패턴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Bateson, 1980: 6). 정통 물질론(orthodox materialism)과 정신 생동론(spiritual vitalism)의 함정을 모두 회피하려는 이 준엄한 생동론(stern vitalism)의 모토는 '형식적 관계에서 더 깊은 대칭성'에 대한 탐색이다.
생동론에 강한 매력을 느낀 과학철학자 조르주 캉귈렘(Georges Canguilhem)은 헤겔이 문화적 구성의 이해를 삶의 현상에 대한 연구자의 개인적 태도와 연관시켰던 점에 기댄다: 과학의 역사는 삶 안에 있는 역사여야 한다.[14] 그의 제자 푸코(M. Foucault)[15]는 그 견해를 지지하면서, 이를 그의 계보적 방법으로 조사된 주제들(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에 대한 관여의 윤리(ethics of involvemen)로 전환시켰다. 캉귈렘과 삶에 대한 찬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지, 그것을 죽임의 방식(way of killing)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 이동성(relative mobility) 속에서 사는 방식이지, 삶을 고정(immobilize life)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환경을 지시하고, 그에 의해 지시를 받는 수 많은 살아있는 존재들 중에서― 아주 하찮거나 상당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평가될 수 있는 혁신의 발현(manifestation of an innovation)이다"(Foucault, 1985: 10).
이러한 의미에서, 삶은 이론을 집어넣고, 생명주의적 특성들, 즉 이동성 또는 유동성, 혁신성 또는 창의성, 관찰자와 관찰자 사이의 엄격한 경계의 철폐를 주입하는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유도한다.
그러나 삶의 주제에 대한 푸코의 주요한 공헌은 다른 곳에 있다.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에서 그는 근대 여명기에 일(work), 언어(language), 삶(life)이라는 세 가지 새로운 지식체의 출현을 분석하면서 특별해졌다. 비록 그것들이 하나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를 구성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삶은 포괄적인 방식으로 그 구성 위에 맴돈다. 사실, 푸코는 '삶'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연사에 의해 조직되고 연구된 살아있는 존재들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에피스테메는 앞으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분류 개념들로부터 삶은 자율성을 가진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지식에 의하여 ―18세기에― 구성된 비판적 관계(critical relationship)로부터 벗어난다. 자유를 깨는 것은 두 가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삶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지식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모든 일반적인 비판적 분석들에 자신을 노출하지만, 그것은 또한 이 비판적 지배(critical jurisdiction)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 지배를 그들만의 것으로 만들고, 가능한 모든 지식 위에, 그것의 이름으로 그것을 투영한다. 칸트에서 딜타이와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전체에 걸쳐, 비판적 사유와 삶의 철학은 서로 마주하고 대립해야 할 방식으로 말이다"(Foucault, 1966: 225).
매우 다른 지적 전통으로부터 온 로이 와그너(Roy Wagner)는 결국 짐멜, 베이트슨, 푸코에 의해 구상된 삶의 주요 측면들을 지지하게 된다. 니체에 의해 명백하게 영향을 받은, 그의 작업은 창의성(creativity)와 발명(invention)으로서의 삶에 대한 개념을 포함한다.[16] 나의 다른 논문에서 언급했듯이, 와그너는 짐멜의 '형태(form)' 대 '삶(life)'의 변증법적인 것 이상일지라도, 계속적으로 비슷한 반대를 다룬다.[17] '관습(convention)'에 반대되는 '발명(invention)'은 그 이분법에 역동적인 면으로 숨을 불어넣는다(animates). 이는 '혁신적 실현의 창의적 행위'('은유 위에 은유', '결정되지 않은' 조건에서 작동)로 구성된다, 마치 음악에서의 '발명'처럼(Wagner, 1981: 9). 삶이 풍부한 사회적 상황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명 시퀀스로서의 삶(life as inventive sequence)은 특정한 성격,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Wagner, 1981: 67).
와그너는 삶 그 자체임을 인정해야 하는 삶에 대한 지식, 캉귈렘과 푸코의 이 개념을 암묵적으로 고수한다. 그의 용어로 '인류학자는 자신의 주제에 자신과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함시키고, 자신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를 발명하는 행위에서 인류학자는 자신의 것을 발명하고, 사실 그는 문화 그 자체의 개념을 발명한다'는 건 이것이 그의 유명한 '문화의 발명(invention of culture)'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Wagner, 1981: 4).
비록 와그너의 작품에서처럼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작업에서 생동론의 영향력을 추적할 수도 있다. 생동론은 종교에 바쳐진 텍스트와 같은 일부 텍스트에서 더 명확하게 정교화된다(Latour, 1990, 2005, 2016).[18] 낭만적이고 생동론적인 본질적 주제, 즉 형태(form)와 정체(stasis)보다 삶의 우월성(preeminence of life)은 '현존'에 대한 찬사(eulogy)의 모습으로 출현하며, 인간과 신성의 즉각적인 접촉의 불가항력적인 조건, 즉 일탈되고 분리된 정신적 대체물인 '표상(representation)'과 대조된다. 라투르는 '정보(information)'와 '변혁(transformation)' 사이의 대립에서 이를 다룬다. 첫 번째 과정은 냉랭하고 무생물적인, 종교적 메시지의 매개된 전달로 구성되며, 두 번째 과정은 신도의 신체와 존재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력들과 양극 사이에서 배태된 관계를 포함한다.
비록 삶의 가치가 여전히 함축적임에도 불구하고, 라투르의 생동론의 상당 부분은 자연(nature)과 신체(body)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 살아있고 생동적인 통합(living and lively unity)에서 우주의 본질적 배태성에 대한 인식 없이는, 과학의 '정화(purification)' 과정, 또는 '사물'과 '사람' 영역 간 이분법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비판을 이해할 수 없다. 삶이 없는 상황에서는 병리학적 전문 용어가 등장할 수 있다: '나는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 신체 정치(body politic)를 더 건강하고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신체 정치에 반대하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이는 생명권력(biopower)에 대한 주장을 판결하는 더 나은 근거 규정을 제공할 것이다'(Latour, 1999: 3).
질 들뢰즈(Gilles Deleuze)―펠릭스 과타리와 와 함께―는 낭만주의적이고 생동론적인 사유의 세련된 철학적 버전을 키워냈다(cultivated). 니체, 타르드,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항상 삶을 주고, 삶이 사로잡힌 곳에 풀어주고, 날아오르는 선을 긋기 위해 글을 쓴다'(Deleuze, 1990: 92). 되기(Becoming; 유동[flux]), 지속 시간(duration), 직관(intuition), 가상(virtuality), 강도(intensity), 변형(transformation)은 '엘랑 비탈(élan vital)'과 관련된 범주이다. 일부 논평가들은 한편으로 클라이스트(Hölderlin, Kleist), 뷔흐너(Büchner), 다른 한편으로는 슐레겔(F. Schlegel), 페흐너(G. Fechner), 우이스퀼(J. von Uexküll)이 그의 글에서 환기시킨 일련의 낭만주의 작가와 철학자들(자연철학자; Naturphilosophen)을 강조한다(cf. Duarte, 2015).
들뢰즈는 '초월적 경험주의(transcendental empiricism)'라고 불리는 추론 방식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순수한 내재(immanence)에 대해 그것은 하나의 삶(A LIFE)이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냥 삶(life)에 대한 내재는 아니지만, 없음(nothing)에 있는 내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삶(a life)이다. 하나의 삶은 내재의 내재, 절대적 내재이다. 이는 완전한 힘, 완전한 축복이다'(Dleuze, 2001[1995]: 27). 하나의 삶(a life)과 그 삶(the life) 사이에 만들어진 중요한 구분이다.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범주의 우주론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
잉골드의 공헌
"우리의 대안은 유기체를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삶-과정(life-process)의 체현(embodiment)로 보는 것이다"(Ingold, 1986: 153).
팀 잉골드(Tim Ingold)는 삶을 '내부의 생동력(interior animating force)이 아니라, 형태가 일어나고 제자리에 고정되는 힘과 물질의 장(field)을 포괄하는 그 생성 능력(generative capacity)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Ingold, 2010: 117). 그는 개인과 사회, 자연과 문화, 생물학과 인간과학 사이의 통상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역동적이고 통합적인 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을 취했다.[19] 삶의 개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작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저술물의 범위를 고려할 때, 나는 그의 주요 분석적 관심사를 표현하는 6개의 텍스트(Ingold, 1986, 1990, 2007, 2008, 2010; Ingold and Descola, 2016)에만 집중할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 잉골드는 끊임없이 '삶' 개념의 중심성으로 돌아갔다.
'표상(representation)'과 '현존(presence)' 간 이분법을 다루는 점(Ingold, 2007: 37)은 '정보(information)'와 '전달(transmission)' 간 차이에 대한 분석만큼 중요하다. 둘 다 라투르에서 '정보(information)'와 '변형(transformation)' 간 대립과 완벽하게 상동(homologous)한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 매혹적인 저서 『라인스(Lines, 2007)』에서, 잉골드는 (선들이 경험적이고, 현재적이고, 전달적인) '삶(life)'의 세계, 그리고 (선들이 정보와 재현의 점들의 행으로만 이뤄지며) 생동없는 '현대(modern)'의 세계 간의 대립을 다룬다"(Duarte, 2015: 191).
잉골드는 삶에 관한 낭만주의적이고 생동론적인 주제들(유동, 되기, 경험의 즉시성, 형태와 정체에 대한 반대 등)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베이트슨처럼 그는 전통적인 생동론과 거리를 두었다. 잉골드에 따르면, '어떤 비-물질, 생동력(vital force)의 현존 또는 부재로부터 구분하려는 초기의 시도는 자연스럽게 과학적 지위로 향하는 생물학의 주장을 더럽혔다'(잉골드, 1990: 209).
그는 생명력(life forces)에 대한 영적인 개념을 대신, 모든 형태(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를 포괄하는 삶의 영구적 흐름 또는 과정(permanent current or process of life)에 대한 모델을 제안했다.
"(…) 사람들이 실제로 이야기해 온, '영혼(soul)' 또는 '정신(spirit)'으로 번역되어 온 말들은, 행동의 끈을 당기는 존재 하나하나의 내면에 감춰진 행위(agency)이 아니라 생동의 흐름이 존재(being)를 진정한 되기(becoming)로 만드는 것이며, 주어(subject)―대명사란 문법 형식을 취하는―가 아니라 동사(verb)―끝없는 자기-창조(self-creation) 과정 안에서 발진(launched)하는―이다"(Ingold and Descola, 2016: 315).
그는 카시러(Cassirer)와 베르그송(Bergson)을 인용하며, 항상 현재의 과정에서 확장된 역동적(dynamic)이고, 이동적(mobile)이며, 삶의 조건(condition of life)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분명히 후생유전학(epigenesis)의 편에 섰고, 삶 형태의 지속적인 창의 편에 섰고, 신다윈주의 유전학의 특징인 DNA의 전형성주의(preformationist) 모델에 반대했다.
"그렇다면 운동(movement)은 본질적인 것이고, 반면 형태의 안정성이 파생된다. 우리는 시계 바늘처럼 유기체를 주어진 실체(given entity)로 시작하여 그것을 움직임(motion)으로 설정해 삶을 되살리진 않는다. 대신, 스스로 창발 구조(emergent structures)를 점차 구축하는 운동으로 삶을 보는데서 시작한다. 요컨대 다윈주의와 반대로, 다르시 톰슨(D'Arcy Thompson)(…)를 제대로 따르자면, 성장(growth)은 단지 계시적인 것이 아니라 형태의 생성(generation of form)이다"(Ingold, 1990: 215).
그는 또한 인간 행동(human action; 짐멜이나 와그너처럼)에서 '그들의 자기 발전(own development) 원형으로서 … 유기체의 보편적 능력'(Ingold, 1990: 224)으로(베이트슨, 또는 마투라나와 바렐라처럼) 바꾸는 '창의성(creativity)'을 강조했다. '삶의 역사(history of life)'를 창의하는 '더욱 일반적인 유기체 이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로 하여금 현재의 정통생물학에 강하게 반대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생물학은 사건에 대한 과정, 실체에 대한 관계, 구조에 대한 발전에 우선성을 주장하는 생물학임에 틀림없다'(Ingold, 1990: 224).[20]
총체론에 대한 언급은 특히 그 관계적 특성과 그것의 감동적인 돌연변이적 특성에 대해 강조되는 우엑스퀼(Uexküll)의 '둘레세계(Umwelt)'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버전을 잉골드를 연결한다. 이는 '발전 중인 체계(systems in development)'(Ingold, 1990: 29)를 파악할 수 있는 '관계적 사유(relational thought)'(Ingold, 2008: 31)에 기초한 인식론적 태도를 암시한다. '전체 사람-유기체(whole person-organism)'(Ingold, 2008: 12)는 '완전한 지각 체계(complete perceptual system)', '지속적인 관계적 장(continuous relational field)'(Ingold, 2008: 31)을 요구한다.
삶은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 간 분열의 불길한 징조인 '표상'에 대항해 우세하다. 그들의 의미 있는 메쉬워크(meshwork) 안에 '대상(objects)'은 없고, 오직 '사물(things)'만이 내재되어 있다. 연속적인 지양(continuous Aufhebung; Ingold, 1990: 21)에는 전달(transmission)은 없고, 창의(creation)와 즉흥(improvisation만이 있을 뿐이다. 잉골드는 형이상학(hylomorphism), 그리고 형식 대 삶의 이분법(form versus life dichotomy)에 대한 동등한 버전을 비판하면서, 파울 클레(Paul Klee, 1973: 269)의 '형식을 주는 것은 삶이다(Form-giving is life)'를 인용해 이렇게 썼다. '형식은 나쁘다. 형식은 끝이고 죽음이다(Form is bad. Form is the end, death)'(Ingold, 2010: 2).
결론
"특정한 나무에 관심을 집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곳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솟아오르고, 가지가 뻗어나가고, 바람에 흔들리며, 새싹이나 잎이 있든 없든, 계절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면, 나무는 대상(object)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나무는 무엇이고 나무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나무는 어디에서 끝나고 세상의 나머지는 어디에서 시작할까? (…) 만약 우리가 이 특정한 나무의 성격이 그것이 바람의 흐름에 반응하는 방식, 나뭇가지의 흔들거림과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나무가 공중에 떠 있는 나무가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Ingold, 2010: 4).
주앙 드 피나-카브랄(João de Pina-Cabral, 2018)은 생동론의 현대적 경향의 측면들을 요약하는 과제를 맡으면서 다음과 같은 삼자적 모델을 제안했다: (a) 유기체의 삶(life of organisms); (b) 사회성의 삶(life of sociality); 그리고 (c) 삶의 사용(use of life). 마지막 두 측면은 내가 현상학적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삶의 형태(forms of life), 아비투스(habitus), 삶의 운명(life destinies), 생계를 유지하는 것(making a living).[21] 첫 번째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이 (아마도 J. von Uexküll의 방식으로) 일상적인 생물학적 지식을 현상학적 성향과 결합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저널에 실린 피나-카브랄의 논문은 다른 풍부한 작업들과 함께 실렸지만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하는 경향을 꽤 표현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종류의 작업에 대한 주된 도전은 '삶'의 다성성(multivocality)이다. 나는 여기―피나 카브랄의 요약과 수직적인 위치―에서 생동론과 낭만주의의 신조가 '삶'의 개념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우주론적 의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조명하기로 선택했다. 이러한 분석적 입장을 취하면서, 나의 접근 방식은 인식론적이다. 나의 분석과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의 효과적인 경험으로서 삶을 다루는 현상학적, 사회학적 연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현대의 사례들은 삶의 경험(life experience), 삶-선(life-lines), 삶의 궤적(life trajectories), 생애사(life histories), 삶에 대한 투쟁(struggle for life), 생명 보험(life insurance), 삶에 대한 증진(promotion of life), 삶의 감각(sense of life), 좋은 삶(good life), 삶의 끝(end of life), 삶의 향상(life-enhancement), 벌거벗은 삶(naked-life),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삶의 '조건'에 대한 즉각적인 경험과 관련된 광범위한 개념들의 사례들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관심이 최소한 3세기 동안 서구 문화의 역사를 따라 뻗어 있는 '삶'에 대한 이념적, 우주론적 차원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개념들이 그들의 사회학적, 현상학적 구체화와 항상 쉽게 식별되거나 구별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은 번성하거나 소멸하기 위해 특정한 살아있는 사회의 효과적인 경험에 계속 의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관념과 이상의 체계를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공통적인 '경험'으로 추진하는 내적 논리가 있다.
수사어구(trope)의 존재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학문적 텍스트에서 학습된 사용법도 나의 역사적 모델에 대한 기준은 아니다. 각각의 경우에 나는 '삶'이라는 범주의 내용을 가지고 작업한다. 생동론의 구성에 대한 제시와 동시대적 연속성의 예로 선택한 각 현대 작가의 분석에서 '내용(contents)'의 풍부한 목록이 기술되었다. 본질적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생동론은 낭만주의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삶의 현상에 더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은 이 광범위한 운동과 많은 특징을 공유한다. 나의 개요는 그러한 꿰미(threads)를 보다 간결한 모델로 수집하라는 촉구이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개념 군집이 포함된다.
사상의 첫 번째 군집은 '총체성(totality)', 즉 '전체의 우위(preeminence of the whole)'와 관련이 있다. 현대 과학 및 정치 이념 내의 '부분들(parts)'에 대한 강조에 대한 총체적인 반대는 '종합(synthesis)', '통합(integration)', '자율(autonomy)', '유기체(organism)' 같은 분석적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 캉귈렘(Cangguilhem)은 '원자성(atomicity)과 총체성(totality)' 사이의 대립를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배태(embeddedness)'와 '망라(encompassmen)'의 범주는 (특히 Hirschman에 이어 L. Dumont에 의해 높이 평가됨) 두 연결된 실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두 번째 군집은 '유동(flux)' 또는 '운동(movement)'에 집중한다. 생동론이 실험과학의 '죽은(dead)' 선택지로 보는 것에 반해, 이 개념들은 '변증법(dialectics)', '발전(development)', '가소성(plasticity)', '변형(transformation)'을 강조한다. 이 과정적 모델(processual model)은 운동을 유도하는 '내재적 성향(inner disposition)'에 대한 고민을 동반한다. (독일의 낭만주의 범주, Streben과 Trieb에서 유래)한 충동(impulse) 또는 추동(drive)은 헤겔적 범주인 아우페붕(Aufhebung)의 인스턴스화인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성향(disposition to rise and move forth)'의 기저에 있다. 이 충동은 '창의적 효력(creative potency)', 즉 단일성(singularity), 진정성(authenticity), 발명(invention), 창의성(creativity)을 지니고 있다.
세 번째 군집은 (개인적, 감각적, 감성적) '경험(experience)'의 우위이다. 주관성(subjectivity)은 객관성(objectivity)에 의해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주변 세계(Uexküll’s Umwelt)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인 견해도 현상의 주관적인 상황을 통해 걸러지지 않는다. 괴테는 이 통찰을 개척했다.
초기 형태의 생동론(그리고 동시대의 '자연주의적' 추종자들을 위한)의 영구적인 도전은 애니미즘 또는 신비주의에 대한 비난이었다. 삶의 경험에 대한 '환원주의적' 버전과는 대조적으로, 이 현상의 출현 특성은 쉽게 '비물질적(immaterial)'인 것(결국, 영적)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 모호한 독일어 범주의 가이스트(Geist)는 '접근할 수 없는 힘', '스며드는 정신', '일종의 신비한 몸'을 언급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현대 생동론의 대부분은, 심지어 그것의 대상의 독특성을 입증할 때에도, 초월적인 조건 (i.e. 잉골드)의 어떤 암시도 피하는 데 매우 열심이다.
나의 즉각적인 관심은 삶의 개념이 인류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성장해 온 내재적이고 관계적인 방식을 조명하는 동시에 두 학문의 중요한 동시대적 경향에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서양 문화의 광범위한 흐름에 대한 역사성과 몰입에 관계없이 이 개념에 대한 단순한 친숙함은 우리의 가장 깊은 문화적 추동과 관련된 논리, 체계성, 지식에 대한 영구적인 관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상(ideas), 개념(concepts), 표상(representations)의 역사는 현재의 문제와 논쟁을 이해하는 풍부한 경로이다. 여기서 나의 입장은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t)'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나의 관심은 삶의 지적 발전에 대한 강력한 이념적 초점을 뒷받침했던 사상 체계의 구성과 진보이기 때문이다. 공허(void)에서 사상이 나오지 않는다. 각각의 새로움 뒤에는 항상 역사와 문화적 토양이 있다. 최근 경향의 메시아적인 어조는 검토해 보면 의미 있는 환상이 된다는 역사적 '역외성(extraterritoriality)'을 시사한다.
앞에서 검토한 역동적인 동시대 인류학적 경향 외에도, 생동론과 낭만주의는 존재론(ontologism)과 관점주의(perspectivism)와 관련이 있다.[22]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현실(존재론)이 문화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cf. Lloyd, 2019: 37). 얼핏 보기에 이것은 오래된 인류학적 진리주의처럼 보이지만, 사실 민족학적 이해를 위한 탐구에서 보편적인 서구 계몽주의 전제와 서구 사상(사상과 표상)의 만연에 도전하는 상대주의의 급진화이다. 인식론적 차이로서 존재론적 차이를 도입하기 때문에 관점주의에 대해서도 유사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다른 문화는 다른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내적, 관점(perspective) 또는 시점(viewpoint)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부활한 헤르더(Herder redivus),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방식으로: 차이에 대한 지적 존중은 각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삶에 대한 관심에 달려 있다. 어떤 의미에서, 생각은 삶의 구성에 굽혀야 하기에, 삶은 생각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 문화에서의 실용적, 즉각적, 신체적, 정의적 현실 감각과 삶은 그것의 사상과 표상을 포괄한다. 따라서 인류학적 분석은 사상과 표상을 해치는 현실과 삶의 내생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반응을 일종의 깨달음으로 간주하려는 지적(그리고 감각적) 노력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역외성(extraterritoriality)"에 대해 반대했다: 중요하고 칭찬받을 만한 통찰력을 향한 추동은 이전의 해석과 모델들만큼 깊이 서구적이며(Duarte, 2015), 인간 과학의 낭만주의적이고 생동론적인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율적이고, 자기 긍정적이고, 내재적이고, 삶의 가치에 대한 존중의 주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문화와 우리 자신의 역사의 다른 시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타자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의 사상과 이상의 토대와 특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현대적 고통(그리고 모든 현명한 평가 또는 전제적 개입)을 이해하는 데 인류학의 가장 큰 기여 중 하나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식은 인류학이 현대 자연과학 내에서 맥을 같이 하는 생동론적 경향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의 인류학은 모든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과 생물의학에 스며있는 현실, 자연과 삶의 지위에 관한 논쟁을 피할 수 없다. 생동론에서 나오는 영구적인 도전은 계속해서 정통 환원주의 생물학을 괴롭히고 인간의 상태에 대한 새로운 프로젝트와 이론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특히 신다윈주의 유전학과 반대되는 후생유전학을 염두하고 있으며(cf. Silva and Duarte, 2016), 결정론적 신경과학과 반대되는 신경발생학도 고려하고 있다(cf. Duarte, 2018).
삶의 현상학적 경험을 다양한 형태로 기술하고 이해하려는 현재의 광범위한 노력은 각 구체적인 에스노그라피의 수수께끼 뒤에 맥동하는 생동에 대한 우주론적 개념에 대한 더 깊은 인식으로부터 얻는 게 있을 것이다.
감사의 글
저자는 이 글의 아이디어를 논의한 몇몇 동료와 학생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2017년 옥타비오 보넷(Octavio Bonet)이 주관한 IFCS/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IFCS/Federal University of Rio de Janeiro)의 '삶, 정동, 감정(Life, affects and emotion)'에 관한 원탁회의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2018년에는 국립 박물관(Museu Nacional)에서 열린 '서양 우주론과 인류학의 자연과 삶(Nature and Life in Western cosmology and anthropological thought)' 세미나에서, 2018년에는 카를로스 사우추크(Carlos Sautchuk)의 초청으로 브라질리아 국립대학 인류학과(Department of Anthropology of the National University of Brasilia)에서 '현대 인류학에서 생동론(Vitalism in contemporary anthropology)'에 관한 학술대회를 마친 후, 2019년에는 마리아나 텔로(Mariana Tello)가 추진한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국립대학 철학·인문학과(Faculty of Philosophy and Humanities of the National University of Córdoba)에서 열린 '자연과 삶(Nature and Life)' 세미나에서 논의했다. 논문 출간과 관련해서, 나는 이 저널의 심사자와 편집자들의 영감을 받았다. 세심한 기여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저자
루이스 두아르테(Luiz FD Duarte)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교(UFRJ, Federal University of Rio de Janeiro) 국립 박물관(Museu Nacional) 사회인류학과 대학원 정교수이다. 인간과학 박사(PhD in Human Sciences, 1985)이며,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étudesen Sciences Sociales)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브라질 기술과학발전협의회(CNPq/MCTI, Brazilian Council for Technical and Scientific Development) 수석연구원이며, 전 리우데자네이루 국립 박물관(Museu Nacional at Rio de Janeiro) 관장, 전 국가신뢰위원회(IPHAN, National Trust Commission) 위원이었다. 그는 가족, 종교, 성, 감성, 삶에 관한 브라질 도시사회의 에스노그라피 현장 연구와 함께 인간됨(personhood)과 자연(nature)에 대한 주제로 광범위하게 책을 썼다.
미주
1. 원래 영어가 아닌 텍스트에서 인용한 모든 것은 저자가 번역한 것이다.
2. '어떻게 사람이 삶, 어떤 삶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가?'(Viveiros de Castro, 2011: 135).
3. 캉귈렘은 자연사와 생물과학이 어떻게 대립된 비전들 사이의 불안정한 개념적 분할로 특징지어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들은 기계론과 생동론(다른 수준에서 그리고 다른 반음모를 통해 대조적), 구조와 기능, 연속성과 불연속성, 전형성과 후성, 원자성과 총체성, 존재와 개성의 발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Cangguilhem, 2012 [1971]: 87; Silva and Duarte, 2016: 429).
4. 또 다른 텍스트에 대안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Sum, ergo cogito)'(Nietzsche, 1974[1886]: 223). 데카르트의 유명한 격언의 이러한 생동론적 반전은 신비주의 로마 가톨릭 철학자 프란츠 폰 바데르(Franz von Baader, 1765–1841)가 만든 '생각당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r ergo sum)' (Gusdorf, 1982: 520)과 비교할 수 있다.
5. 프리드리히 니체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괴테, 헤겔, 피히테, 셸링, 쇼펜하우어와 같은 비합리주의 사상가들의 긴 혈통의 명백한 상속자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그의 열광은 낭만주의 (그리고 생동론자) 구성에 그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다.
6. 이 획기적인 이념적 흐름을 참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의 기본적인 원칙에 관한 첫 번째 중요한 책은 1857년에 출판된 모렐(B. A. Morel)의 인간 종의 퇴화에 관한 논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로르다우(M. Nordau)의 책(Entartung [퇴화], 1892)은 니체의 연구의 일부 차원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구성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Pick (1989), Kaufmann (2003), Caponi (2012)를 참조하라.
7. Drysch에게 entelechy는 집중적이고 질적인 목적론적 생명력이다.
8. 보다 최근에는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이 기호학과 관련하여 인간보다 넓은 생각에 대한 대담한 분석에서 유사한 경로를 따른다(cf. Kohn, 2013).
9. '연결되는 패턴은 메타패턴이다. 그것은 패턴의 패턴이다. 그것은 연결되는 패턴들이다'(Sheldrake, 1988: 8)라는 방대한 일반화를 규정하는 것이 메타패턴이다.
10 셸드레이크(Sheldrake)는 아마도 그의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생동론적 전통에 대한 그의 충성에서 가장 노골적일 것이다(Sheldrake, 1988).
11. 게오르크 짐멜의 사상은 신칸트주의적 영향과 (A. Schopenhaur와 S. Kierkegaard를 통해) 당대의 생철학과 (W. Dilthey를 통해) 해석학에 대한 명백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자연주의적' 생동론자 야코프 폰 우엑스퀼(Jakob von Uexküll)과 한스 드리스흐(Hans Driesch)도 자유철학 운동의 추종자들이었다.
12 짐멜은 이전의 정체성이나 상태를 잃지 않으면서 변증법적으로 우월한 존재 수준으로 승천하는 것의 질로서 헤겔적 범주인 Aufhebung을 사용한다. Sublation은 가능한 영어 번역이지만, 이것은 나에게 부족하다.
13. 그레고리 베이튼은 다윈주의의 기계론적 차원에 대한 해독제로서 라마르크의 사상에 대한 접근과 말리노프스키와 보아스의 인류학의 낭만적 측면에 대한 즉각적인 노출(후의 경우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로부터 직접적인)이라는 적어도 두 가지 출처로부터 생동론에 접근했다.
14. '헤겔에 따르면, "생명은 개념과 그 실재의 즉각적인 일치이며, 전자는 후자와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Cangguilhem, 2009[1968]: 368).
15. 푸코는 캉귈렘의 개인적인 제자였고, 또한 니체와 현상학 (Husserl and Heidegger)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질 들뢰즈와 꾸준한 대화를 유지했다.
16. 로이 와그너는 헤겔과 니체에 의해 그의 사유에 영향을 미친 영향을 묘사한다 (그는 니체로부터의 인용으로 『문화의 발명』을 마무리한다). 그는 그레고리 베이튼, 루이 뒤몽, 알프레드 쉬츠, 장 폴 사르트르, 프란츠 보아스, 오스왈드 스펭글러를 인정하듯이 인용한다.
17. '서양 사상의 현대 반모더니즘 경향은 낭만주의의 진정한 '창조적 재창조'에 '정신', '행동', '의지', '경험', '삶', '주관성', '창의성', '통합성', '독특성' 등의 범주를 끊임없이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성주의 이데올로기의 '무생물 기어'와 삶의 '역동적 에너지' 사이의 헤르데어적 대립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비코의 '재구성적 상상력'(Duarte, 2015: 189)에 삶을 다시 불어넣는 '인간 문화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실현'(Wagner, 1981: 37)이 끊임없이 촉구된다.
18. 브뤼노 라투르는 G. Fechner, R. H. Lotze 및 A. Schopenhaur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Gabriel Tarde의 매우 명백한 제자이다. 그는 A. N. Whitehead (H. Bergson의 강한 영향)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종교에 대한 그의 작품에서 그는 Emmanuel Mounier, Jacques Maritain 및 Teilhard de Chardin과 같은 중요한 생동론자들을 수용했던 로마 가톨릭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애착을 드러낸다.
19. 팀 잉골드는 M. Merleau-Ponty, H. Bergson, A. N. Whitehead에게 명백한 빚을 지고 있다. M. Heidegger, J. von Uexküll, E. Cassirer, G. Bateson은 그의 이론적 제안 중 일부를 강화하기 위해 언급된다.
20. 이 대목에서 어떤 낭만적 경향의 매우 특징적인 흥미로운 점이 나타난다. 피나-카브랄이 '그러나 유기체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물학이 필요하다. 아니면 오래된 생물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 그것의 총체적 열망은 다윈 이전의 세계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피나 카브랄, 2018: 224)라고 말할 때, 그는 전근대적 사유가 현대적 사유보다 더 통합적이고, 내재적이며, 진정한 것이라는 노스탤지어적 인식을 지지한다. 예를 들어, 라투르는 내가 전에 언급했던 전통적인 종교적 '변형'에 대한 그의 칭송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정을 제시한다.
21. 중요한 단서는 E. Husserl의 삶의 세계(Lebenswelt) 개념에 대한 중심적인 언급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확신 속에 사는 것이다(Husserl's Crisis [1954] 1970: § 37; Föllesdal 2010: 40 인용)'(Pina Cabral, 2018: 524).
22. 이 글에서는 '관계 존재론', '환경의 인류학', '기술의 인류학' 등 생론과 강하게 연결된 다른 현대 영역은 다룰 수 없다. 그들이 관점주의와 존재론과 밀접하게 접촉하여 진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들이 이득을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