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마다 수업마다chat GPT를 못 쓰게 하는 곳도, 잘 써보게 하는 곳도 있던데,뭐가 됐던 문제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어려운 문제겠지만,chat GPT 이슈의 한 단면을 기록해보자고,어느 이메일에 보냈던 내용을 여기에 올린다.chat GPT와 user를 network로 보자면,네트워크 바깥과 만나는 경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자는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올려본다.보내주신 답변 잘 들었습니다. '읽었으나 어려웠고,이해를 돕기 위해 chat GPT를 사용하였다가, 그 내용이 과제에 일부 반영되었다.'이렇게 이해했습니다.추가로 정보를 찾아보는 건, 좋은 공부 방법이에요.저 역시, 내용을 모르겠으면 외국어 사전이나 백과사전, 다른 서적을 찾아보기도 해요.학술적 글쓰기에서는 어쩔 ..
신해철, 1996, "70년대에 바침"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 않았지 ... 나에게 80년대는 혼란의 유년기였다. 슈퍼 앞에서 놀다가도 국기 하강을 하면 가슴에 손을 얹었고 성화 봉송에 동원되어 깃발은 흔들었지만 88올림픽을 좋아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집에 데려가서 광주 학살 사진집을 보여주던 친구에게 '우리 집에도 이런 거 있어'라며 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그 때, 군화발에 짓이겨진 턱이 돌아가버린 사진을 펼쳐놓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고모, 삼촌들이 많이 오셨다. 수배 당한 이름 모를 운동가들도, 아빠의 동료들도 오시면 일단 좋았다. 그 무릎에 앉아 늦게까지 안 잘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아버..
의료사협연합회의 작은 연구 프로젝트 덕분에, 오랜만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한 내용을 다시 들으면서, 녹취를 고치며 작성하는 글에 반영하고 있다. 잊혀졌을 것 같지만 녹음을 다시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흐름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인터뷰 당시엔 상대방의 이야기를 눈빛으로 끌어내느라 온 힘을 들이고 있었기에, 내 반응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녹취를 풀고 한 마디 마디를 다시 읽으면서는... 뭐랄까...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혼자서 그 사람의 말을 되내어보고, 중요한 부분은 여러 번 웅얼거린다. 방문의료 간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참 멋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니, 나 역시 기쁘고 활력이 생긴다. 감사한 시간이다. 저 사람이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엄마는 잠을 계속 못 주무셨다. 홀로 계신 집에 거실에 놓인 영정 사진말고 다른 물건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느날 아침, 단톡방에 사진을 올리셨다. "이게 언제예요?! 어디지?" "동해 하조대인 것 같아.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네... " "제가 한 2~3살 되었겠는데요? 한 82~83년?" "3~4살 정도인 거 같다." "둥둥이보다 어릴 때네요 ;]" "그런 것 같지? 차도 없었을텐데 둘 데리고 어찌 갔을꼬. 기억의 꼬리를 잡을 수가 없네..." 밤새 못 주무시고 집안을 뒤져보셨나보다. 또 한번은 새벽에 사진을 보내셨다. 아침이 되서야 메세지를 확인했는데, 그때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몰랐던 엄마의 모습, 아빠의 모습. 저때 엄마는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엄마의 밤은 그렇게 ..
"아빠, 막걸리 한 잔 안 해도 돼?" 간단하게 칼국수와 수육을 시켰더니 다섯살 아들 시원이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아버지의 첫 재를 지내고 집 앞으로 돌아온 길이었습니다. 상례를 치르는 어려운 시간 동안 가족들을 배려하는 다섯살 배기 시원이의 마음이 정말 고마워서, 엄마와 아빠는 막걸리 한 잔씩, 시원이는 물 한 잔을 두고, 할아버지 먼 길 조심히 가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다섯 살이 되자마자, 시원이는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신 걸 계속 지켜봐왔습니다. 그리고 눈감은 시체로 또 화장한 가루가 된 할아버지의 모습도 모두 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원이는 죽음을 이해하며 슬픔을 격려해주는 정말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제가 무너지려고 할 때 시원이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
아버지께서 긴 여행을 출발하셨습니다. 장례식장에 오신 여러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버지가 행복하셨다고 한 게 과연 무엇일까? 한 자리에 섞일 것 같지 않은 친구들을 엮어내셔서 즐겁게 어울리시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료들과 모임을 만들어내시며 함께 더불어 하는 즐거움으로 그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내는 일 바로 장례식에 모이신 분들을 보면서 아 바로 이거구나 아버지가 말씀하신 행복이라는 것이 바로 사람들, 모여서 더불어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여행의 출발점은, 본향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 아직도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저도 작은 우주들을 함께 만들어내며, 살기 좋은 ..
“아버지는 행복했단다” 아버지께서 오늘 낮 2시 30분 경 돌아가셨습니다. 2월부터 지난한 항암치료에 힘들어하셨지만, 9월 초 전시회를 치르면서 지인분들을 한 분 한 분 만나셨고, 9월 말 연휴 새벽에 응급실로 옮겨서 병동에서 잘 싸우시다 가족과 친구분들 사이에서 오늘 차분히 잠드셨습니다.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장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4호실 9/26~28(수~금) 영결식 9/27(목) 19:00 발인 9/28(금) 08:30 정말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남기셨습니다. ‘노래를 불러주시면 함께 따라서 부르시겠노라’고 자리에 오셔서 따스한 인사와 따뜻한 식사로 아버지 가시는 길, 행복으로 채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