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카데미의 친구들: 오래된 극장 너머 ‘기억의 실천’”을 발표하게 된 송준규입니다. 반갑습니다.이 발표에선 원주에서 발견한 ‘소셜 네트워크의 생동’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아카데미의 친구들’입니다.비록 극장은 철거되었지만, 이들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호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2016년 오래된 단관 극장 ‘아카데미’를 지키려는 젊은 시민들의 ‘취향 공동체’로 시작하면서, 쌓여온 시간의 켜를 하나씩 발굴하며 이곳에서의 상상을 함께 하며 서로를 결속했습니다. 이렇게 가치를 만들어내며 관계를 확장해갔습니다.소유주–시청-시민들 사이에 ‘거버넌스’를 만들어 극장을 ‘근대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2022년엔 원주시가 극장을 매입하고 시민 단체에게 임차를 준비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이내 시장이 바뀌고 ‘거버넌스’는 깨지면서 2023년 시청은 일방적인 철거 계획을 발표합니다.놀란 이들은 해본 적 없는 ‘투쟁’에 들어갔고,시청과 시민들을 설득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일방적인 행정 절차로 극장은 결국 철거되었고전투 같은 나날을 보냈던 이들에겐 ‘법적 소송’이 날아들었습니다. 철거용역사를 동원해서 업무방해라며 시청이 제기한 이 소송은 가히 ‘부정적 거버넌스’라고 부를 만합니다. 1심에서 용역사는 되레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진술했고 법정은 ‘시민의 공적 감시에 대해 시청이 의견 수렴과 설득 절차가 없었다’고 역으로 지적하며 24명 모두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바로 항고에 들어갔습니다.영화와 예술을 사랑하던 평범한 동네 청년들은 이제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호 아래 지역 이슈를 발굴하고 노동조합, 원로, 장애인, 여성, 예술가 등 활동가들과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극장이 없어졌는데도요. 이들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며 사연과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전시하고, 또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그들의 ‘가치’가 계속 살아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이 발표에선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 활동을 되짚어보며, ‘기억의 실천이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것’인지 제 고민을 털어놓고자 합니다.기억을 개인의 내면 또는 심리의 문제로만 다룰 순 없습니다. 코너턴은 ‘사회적 기억’이, 책이 아니라 ‘몸의 습관’과 ‘의례적 수행’으로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사회적 기억은 ‘기록된 역사’와 다르다는 겁니다. 마을의 수다나 소문처럼 비공식적이고 반복적이며 서사 이전의 구조가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지는 것’, ‘생성되는 것’이라고 보았죠.‘아카데미 극장 시민 활동 아카이브’의 구성을 보면 ‘원주 단관극장의 역사’ 그리고 ‘아카데미 극장의 공간들’ 챕터로 시작합니다. 지역의 오래된 역사를 담은 ‘공간’을 보존하고 새롭게 살려내자던 이들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극장 자체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죠.그러나 사회적 기억이 ‘콘크리트 건물’에 담겨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실제로 이들에겐 ‘아카데미 극장’에서의 과거 경험보다, 여기에 쌓여있는 시간의 켜를 ‘발견’하고 어떻게 새롭게 살릴 수 있을까 ‘상상’하는 현재 경험이 이들의 ‘사회적 기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회적 기억’을 담아내던 건 어떠한 종류의 상상력, 함께 상상하고 행동하는 과정이 이들의 ‘사회적 기억’을 생성하는 곳이었습니다. 기억은 문서도 건물도 몸도 의례도 아닌 ‘함께 하는 상상적 실천’ 속에 있었습니다.‘사회적 기억’이라는 건, 단순히 ‘기억들을 모아내는 일’과는 다릅니다. 사회적 기억이란 어디에 ‘담겨’ 있는 것인가 보다 어디로 ‘흘러’ 가는 것인가로 봐야하지 않을까요?우리는 ‘기억을 지우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코너턴은 ‘망각을 낳는 도시’를 지적합니다. 너무 빠르고, 너무 크고, 자주 파괴되니, 임시성 속에 산다는 거죠. 중요한 건, ‘장소에 뿌리내린 기억’입니다. 코너턴은 장소 기억을 무언가를 기념하라며 설계된 장소를 ‘메모리얼’, 그리고 일상이 담긴 장소로 몸이 습관을 형성하는 ‘로쿠스’라고 코너턴은 구분합니다.메모리얼이 기억의 코드를 심어놓은 계획된 공간이라면, 로쿠스는 기억이 습관·몸짓·경로에 깃들여 유지되는 장소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아카데미 극장 사례는 이 둘 사이에서 진동합니다. 비틀렸다고나 할까요. 극장을 지키려고 ’기억의 코드‘를 심은건 시민들이었고, 관행적으로 철거한 건 시청이었습니다.기억이 깃들이던 순간은 사실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던 때가 아니라, 이곳을 되살리려는 이들의 상상이 펼쳐지던 때였습니다.코너턴의 ‘메모리얼’과 ‘로쿠스’의 구분은 비틀어졌어도, 기억을 위한 ‘고정된 장소 체계’를 해체하고 기억이 ‘쌓이는 곳’을 찾아보자던 그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보입니다. 이젠 ‘place memory’나 ‘habit memory’를 구분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 필요해보인다.관계 속에서 쓰이는 기억 존 A. 반즈는 1951년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책이 아니라, 집단의 이름들 그리고 그 사이의 '기억된 연결' 속에서 쓰여진다” 포트 제임슨 응고니 사람들의 유동적인 역사 이야기를 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해서 고민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를 만들던 때에는 기록할 수단이 없었지만, 이젠 기록할 수 있게 되어도 만들어낼 역사가 없다” 사람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역사’는 통치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관계의 기억’이었다는 점을 짚어냈습니다. 사회 관계에 기억 구조가 들어있다는 그의 관점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극장은 무너졌고 법정에 불려 다녀야 했지만, 이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되레 원주 안에서 ‘새로운 연결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습니다. 극장이 철거되었을 때, 이들은 건물의 역사도 행정의 기록도 아닌, ‘서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의지했습니다. 힘들 때 누가 도와줬는지, 어떤 밤을 함께 보냈는지, 어떤 관계가 새로 생성되었는지…반즈가 말한 ‘기억된 연결’은 원주 안에서 실제로 생성되고 있었습니다.‘무너지지 않는다’는 이들의 구호는 ‘극장 건물은 무너졌어도, 우리의 관계는 더욱 살아날 것이다’는 뜻이었습니다.만약 건물과 공간에 초점을 맞추면, ‘살리려던’ 극장을 무너뜨리고새로 지은 건물에도시‘재생’센터가 입주했다는 아이러니만 보이게 됩니다.하지만 관계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생성되는 연결들’을 만나게 됩니다.‘아카데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마추어’들입니다. 잉골드는 아마추어를 ‘서툰 사람들’이라기 보다 ‘관행이나 전문성에 갇히지 않은 채, 어떤 일에 열정과 사랑으로 몰입하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원주라는 도시는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젠 도심 안쪽의 오래된 공간들마저 재편되면서 ‘도시재생’과 ‘재개발’이 뒤엉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래된 극장 하나를 살려보자’는 시도는 ‘기억을 지우는 도시’에서의 ‘기억’이란 깃발을 들어 올리는 일이었습니다.잉골드가 말하는 '조응’이란 ‘함께 움직이고 서로를 따라가며 변형시키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미 완성된 개체들이 교류하는 ‘상호작용’과 달리, ‘조응’은 함께 살아가며 선을 그려가는 ‘진행 중인 운동’이자, 계속 ‘이어지고 변해가는 대화’입니다.아카데미의 친구들은 그런 점에서 ‘기억을 지우는 도시’ 안에서 ‘기억을 담을 건물’을 찾아냈고, 이를 ‘함께하는 관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관계를 ‘확장’하며 소유주-시청-시민의 거버넌스를 구성하며 ‘재생’을 향해 갔지만, 이내 그 거버넌스가 깨지자 ‘투쟁’으로 실천 모드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기억의 실천’이 ‘재생’ 모드에서 ‘투쟁’ 모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60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철거할 위기 앞에서 이렇게 기억과 추억을 내세웠죠.극장이 무너지는 순간, 철거되는 건물 안으로 기어들어가 ‘투신’하던 몇몇은 아직도 그때의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가 떨립니다.이제는 괜찮은 척 씩씩하게 활동하지만, 마이크 너머 들려오는 떨림엔 여전히 두려움이 담겨 있었습니다.극장이라는 건물이 무너졌을 때, 이들이 발견한 건 ‘두려움’ 또는 ‘아픔’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구호 아래, 활동을 계속했고 관계를 확장해갔습니다. ‘건물이 전부가 아니다’는 새로운 감각, 어떠한 깨달음을 공유했던 건 아닐까요?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보여준 기억의 실천에는 바로 이 ‘조응하는 관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건물이 사라졌지만 관계가 이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지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얽혀 있는 관계망 위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그게 어떻게 이 관계를 계속 살아있게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들의 관계 위에 놓여있는 ‘기억’이란 ‘실천’을 거치며 ‘지속’됩니다. 기억의 ‘계속되는 생성’ 속에서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억과 관계가 서로를 지속시키게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기억이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하는 것’, 그렇게 살아있게 하는 것 아닐까요?필드워크 중이었지만 2023년 아카데미 극장이 철거될 때 저는 그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쌓여갔습니다.원주에서의 어느 밤, 아카데미 극장에 대한 전시가 열리던 골목 안 아뜰리에에 들어갔을 때 작가이자 주인장은 문을 열어주며 말했습니다. “미안한 게 어디있어요, 각자 할 수 있을 때 하면 되는거죠.” 관계가 이어지는 손길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 원주에서 그렇게 찾으려던 ‘네트워크의 생동'는 「한살림 선언」 같은 글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함께 할 때’ 관계의 생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실천을 무엇이라 봐야할까요. 이전에는 ‘사회적 관계 위에 놓여진 무언가의 작동’으로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작동’ 대신 ‘생동’ 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사회와 무언가 사이에서 서로 ‘조응’하는 것이라면 위가 아니라 안,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서로 간의 생동’이라고 봐야 하는 건 아닐까요. ‘인간이냐 비인간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관계의 생동’에 대해 논해야 하지 않을까요.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 어디서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는가, 무엇이 이 관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가… 만약 실천이라는 말이 이러한 의미를 담는다면,저는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하는 이 활동을 ‘기억의 실천’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