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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ANE, John, 2019[1989], "New Social Movements and Everyday Life: A Dialogue with Alberto Melucci", Routledge Handbook of Contemporary European Social Movements, Routledge, https://www.taylorfrancis.com/chapters/edit/10.4324/9781351025188-13/new-social-movements-everyday-life-john-ke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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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사회운동과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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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멜루치와의 대화

 

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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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다음에 실린 알베르토 멜루치(1943~2001)와의 대담은, 1988년 2월 말 밀라노에서 (폴 미어와 함께)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진행한 대화에서 뽑아낸 것이다. 이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은 중국에서의 극적인 사회적 격변과 소련의 붕괴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전혀 다른 세계적 조건 속에서도 이 대담을 축약 형태로 다시 싣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는데, 집합행동 연구의 장을 다시 상상하자고 촉구한 멜루치의 요구가 기이할 정도로 현재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저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알랭 투렌에게 사사받은 정신분석가이기도 한 멜루치는, 집합행동의 만화경 같은 역동을 탐구하기 위한 정교한 새로운 유형의 에스노그라피 방법론 개척했다. 그는 사회과학의 개념 언어를 다시 생각하고 수정하는 일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주요 이론적 성취에는 ‘사회학적 레닌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 그리고 산업시대의 계급갈등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회운동’ 핵심 개념 자체를 과감하게 문제 삼으려는 의지가 포함된다. 이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Die sozialistischen und kommunistischen Bewegungen seit der dritten französischen Revolution』(1848) 같은 저작에서 확인되는 문제틀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이 대담에서 멜루치는 투렌의 사회학적 개입(intervention sociologique) 접근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Marxism)와 자원동원이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도 창의적으로 끌어들인다(Melucci, 2000a, 2000b). 그는 페미니즘, 생태, 그리고 다른 신사회운동을 일상생활의 지배적 코드와 권력관계를 바꾸려는 시민들의 매우 개인적인 투쟁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실험실들 안에서 새로운 공유 의미삶의 방식이 발명되며, (동성혼, 장애 관련 운동, 반인종주의적 실천에서처럼) ‘다를 있는 권리(rights to be different)’가 정의되고 옹호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은 기존 정당, 정부, 기업, 국가기관과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멜루치는 이러한 ‘현재의 유목민(nomads of the present)’ 운동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도 지적한다. 그는 이들이 나르시시즘과 폭력으로 기울 소지가 있음을 숨김없이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들의 ‘메타-정치적(meta-political)’ 성격을 높이 평가한다. 예컨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량, 그리고 핵무기의 위험이나 비인간 종에 대한 인간의 무모한 파괴처럼 —위태로운 지구 어디에서도 아직 실행 가능한 해법이 발견되지 않은— 문제들을 공론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독자들은 현재 절판된 『Nomads of the Present: Social Movements and Individual Needs in Contemporary Society』(1989)에 처음 실렸던 이 인터뷰의 완전판을 읽으며, 아래의 주제들을 더 깊게 탐구해보기를 권한다.

 

 

[새로운 조건들]

 

 

#Q1.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형태의 집합행동이 ‘복잡(complex)’한 탈산업 사회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에서 태어난다고 분석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 체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저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모델과 사회주의 둘 다와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세 가지 주요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인정하면 우리 사회의 성격—그리고 그 한계—에 대한 논의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체계에서 '정보(information)'가 핵심 자원이 되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정보가 의식적으로 생산되고 통제되는 방식에 의해 가능해지고, 또 그 방식에 의해 형성됩니다. 지각과 인지가 만들어내는 ‘형식(forms)’ 또는 이미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의사소통적 환경과 맺는 관계를 점점 더 조직합니다. 자연자원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이제 이러한 인지적·의사소통적 ‘형식’의 생산과 통제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물질적 생산에 기반한 권력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닙니다.
둘째, 이 체계는 '지구적(planetary)'이 되었습니다. 즉, 완전히 상호의존적인 세계체계가 되었고, 그 경계 바깥에 있는 ‘무언가’나 ‘누군가’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이 체계는 전지구화(planetarization)의 토대만 놓았던 자본주의 체계와 다릅니다.
셋째,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체계 안에서 주요 행위자는 더 이상 계급의식, 종교적 소속, 또는 민족성으로 규정되는 집단이 아니라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를 개별화하려는 개인들입니다.

 

 

#Q2. 선생님의 복잡 사회에 대한 견해는, 자본주의 사회의 거시구조와 그 갈등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정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접근과 종종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런가요?

 

저는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거시구조 분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의 사회운동 분석들에 대해 제가 비판하면서도 설명하려 했던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원동원이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 같은 시장 기반 분석들은 구조적 경계와 거시적 권력관계라는 개념을 없애버리고, 모든 것을 계산, 협상, 교환으로 환원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분명한 논리와 분명한 한계를 가진 체계 안에 살고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강력한 ‘작동 가설(working hypothesis)’로 받아들입니다. 설령 그 한계들이 지금은 불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특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재정위기(fiscal crisis), 조합주의(corporatism), 경제 재구조화(economic restructuring) 같은 틀로 체계를 분석하는 최근의 마르크스주의 논의들은 흥미롭고 자극적입니다. 그 논의들은 체계의 몇몇 중요한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제가 문제 삼는 지점은, 이런 분석들이 동시대 사회에 대한 자기들의 ‘특정한’ 설명을 일반 이론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사회의 어떤 핵심 메커니즘 몇 가지에 대한 ‘지역적(regional)’ 설명을 내놓는 데 그칩니다.

물론 이런 이론들은 우리에게 지적·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지적 틀 안으로 새로운 현상들을 편입시켜, 불확실성의 원을 닫아주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것이 하나의 지적 환원주의(intellectual reductionism)입니다. 그것은 제가 앞서 말한 ‘막다른 상태(impasse)’를 창의적으로 선언할 필요를 부정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이 체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설명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 단순하고 현실 그 자체를 포괄할 수 없는 전체화된 개념들에 의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기존 사회운동 이론 비판]

 

 

#Q3. 그래서 선생님께서 ‘복잡성(complexity)’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시면서, 19세기적 ‘사회운동’ 개념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집합행동의 이질성(heterogeneity of collective action)을 하나의 핵심 개념으로 —예컨대 계급투쟁이라든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역사적 역할 같은 것— 통일하려 하거나, 혹은 경험적 일반화를 통해 하나로 묶으려는 경향은 사회운동 연구의 전체 전통 속에 깊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향은 오해를 낳습니다. 집합행동은 언제나 ‘구성적(composite)’이고 ‘복수적(plural)’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집합행동에는 여러 수준, 여러 의미, 여러 형태의 행위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특정한 맥락에서 어떤 행위 유형이 가장 효과적이고 눈에 띄게 보일 때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집합적 동원은 ‘진보’나 ‘반동’ 같은 단순한 공식으로 요약될 수 없습니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저작들은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반항의 세기(The Rebellious Century, 1975)』와 『동원에서 혁명으로(From Mobilization to Revolution, 1978)』에 담긴 역사 연구는 매우 유익하고, 집합행동의 이질성을 보여주는 경험적 증거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보면 그는 여전히 기본적인 마르크스주의 틀 안에서 작업합니다.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동기가 ‘이익(interests)’이라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이익’ 개념에 기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분석 틀은 집합행동의 ‘정치적 차원’에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 편향은 —다시 말해 사회운동의 다차원적 성격을 가려버리는 이 편향은— 집합행동이 정치체계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틸리의 집요한 관심에서도, 그리고 그가 공적(public) 데이터 자료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공적 자료는 아마도 정치 권력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행위 유형들 쪽으로 편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이런 정치적 분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때문에 사회운동의 복잡성이 가려지게 됩니다.

 

 

#Q4. 전통적인 집합행동 설명과 달리, 자원동원이론은 불만(grievances)과 박탈(deprivations)이 공적 항의와 운동의 ‘주된’ 동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 통찰은 얼마나 중요한가요?

 

말씀하신 대로 저를 처음에 끌어당긴 것은 자원동원이론이 집합행동의 동기가 ‘이익(interests)’이라는 순진한 전제(마르크스주의 전통 전반에 널리 깔린 전제)를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또한 고통과 사회적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집합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상식적 가정도 거부합니다. 자원동원이론은 이런 견해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 이론이 말해주는 건, 이미 존재하던 부정의와 불만만으로는 행위를 설명하기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운동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가’를 묻는 질문이 가능해지는 중요한 이론적 공간이 열립니다. 자원동원이론은 세 차원 사이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첫째, 이미 존재하는 사회문제. 둘째, 행위자들 사이에서 ‘공통의 이익(common interests)’에 대한 공유된 감각이 형성되는 과정. 셋째, 집합행동 그 자체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단지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나 또는 흔히 공유되거나 귀속된 이익만을 근거로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통찰들을 사회운동 형성에 대한 제 이해 속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행위자들이 어떤 것을 ‘불만’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는, 그들이 ‘객관적 문제’가 자기들에게 문제적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인지적·상호작용적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객관적 문제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그것을 ‘그런 것’으로 지각하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이 ‘문제’로 존재하게 됩니다.

 

 

#Q5. 선생님의 접근이 마르크스주의와 자원동원이론뿐 아니라, 위르겐 하버마스가 제시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이론까지 포함한 기존 사회운동 접근들의 ‘주체-객체’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사회적 (social life)  ‘객관적’ 차원 또는 ‘주관적’ 차원 중 한쪽만을 강조합니다. 즉, 경제적 생산과 교환 영역에서의 운동 법칙 같은 사회 구조에 새겨진 강력한 힘을 강조하거나, 혹은 행위자들의 믿음, 의도, 표상, 문화적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 사회과학 전반, 특히 지금까지 사회운동 분석을 이끌어온 역사철학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역사철학들은 대체로 사회운동에 혁명적 역할을 부여하거나, 국가권력의 장악이 집합행동의 핵심 목표라고 가정하거나, 혹은 집합행동이 사회질서를 전복한다는 보수적 신화를 받아들이곤 합니다.

제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전반적으로 제기하는 이의는, 그것이 행위자들이 상호작용하는 환경이 제공하는 (제한된) 자원에 기대어 사회적 행위를 어떻게 구성하고 ‘활성화’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구조이론은 행위의 ‘환경적 한계’를 설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행위는 결코 ‘주어진 사실’이 아닙니다. 사회적 행위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생산됩니다. 어떤 구조들의 경계 안에서, 사람들은 인지적·정동적·상호작용적 관계에 참여하고, 자신의 사회적 행위를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사회적 환경까지도— 창조적으로 변형합니다. 물론 이것은 기껏해야 예비적 정식화, 말하자면 집합행동에 대한 이분법적 분석을 넘어서는 ‘첫걸음’에 가까운 것임을 저도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것이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꼭 밟아야 할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Q6. 이 ‘첫걸음’이, 개인들이 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는지라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네, 도움이 될 겁니다. 집합행동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는 크게 두 가지 지배적인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자들이 사회구조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와, 그들의 믿음과 행동 양식 사이에 어떤 경험적 연결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접근입니다. 설문조사, 인터뷰 등 여러 방법을 통해 노동자, 학생, 운동 활동가 같은 집단들의 사회적 배경, 태도, 활동에 관한 자료를 모읍니다. 이 접근은 집합행동의 ‘구조적 변수’와 ‘행동적 변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죠.
다른 하나는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사회적 행위자들이 문서와 연설에서 자신들과 자신들의 사회적 현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피는 접근입니다.
제 생각에 두 접근 모두 매우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 둘 다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서 ‘운동’이라는 무언가를 구성해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제 경험적 연구는 바로 이 문제에 집중했고, 이를 검토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론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 연구 방법론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첫 단계에서는 밀라노 지역에서 집합행동에 관여하는 다양한 집단들을 폭넓게 조사했습니다. 이 첫 단계는, 이 집단들이 어느 운동의 ‘활동적 구성원’이라고 스스로 규정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회운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경험적 가정에 기반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 모든 집단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당장의 목적은 단지 집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인 우리와 그 집단 자체 사이에 ‘작동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계는 연구팀의 많은 노력과 집중 훈련을 필요로 했고, 방법론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단계 덕분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실험적’ 단계에서는, 심층 인터뷰 동안 형성된 기존의 관계를 더 깊게 하고 확장했습니다. 우리는 각 운동에서 관찰할 집단 하나를 선정했습니다. 이 실험 단계에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디오로 녹화되는 세션에서, 우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행동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동시에 그 집단 구성원들 역시 자신들의 관계를 ‘활성화’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찰하며,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집합적 정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을 —즉 스스로를 운동의 참여자로 규정하게 되는 과정— 모의실험하듯 재현해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Q7. 그렇다면, 이런 경험적 연구 방법은 알랭 투렌(Alain Touraine)의 ‘사회학적 개입(intervention sociologique)’ 방법론과 충돌하지 않나요?

 

제가 알기로 투렌은 사회운동의 ‘행위의 장(field of action)’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입니다. 저 자신의 경험적 연구 기법도 투렌의 개입 사회학 방법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만 저는 그의 연구 방법 두 가지 측면을 비판적으로 봅니다.

첫 번째 이견은, 투렌이 사회운동에는 ‘가능한 최고 의미(highest possible meaning)’가 있다고 가정하는 점입니다. ‘가능한 최고 의미’라는 생각은, 어떤 역사적 시기마다 하나의 ‘중심 사회운동’이 존재한다는 가치부여된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다른 모든 형태의 집합행동이 ‘더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제 연구 방법은 이런 규범적 가정(normative assumption)을 피합니다. 제 방법은 집합행동의 ‘진리’를 안다고 가정하지도 않고, 행위자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안다고 전제하지도 않습니다. 누구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제 방법은 집합행동의 서로 다른 수준과 의미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위계적으로 정렬되어 있다고 가정하지 않은 채, 그 차이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조사 과정의 ‘실험 단계(experimental phase)’가 겨냥하는 바입니다. 이 단계는 집합행동의 다양한 의미들이 드러나도록 유도합니다.

실험 단계에서 제가 두는 유일한 가정은, 행위자들이 자기 행동의 의미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늘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부분적으로는 압니다. 물론 우리가 하는 일에 혼란을 느끼거나 감정적으로 깊이 얽히면, 어떤 것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행동의 서로 다른 의미들을 분석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게 되죠. 집합행동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집합적 행위자들은 자신이 오직 일부만 통제할 수 있는 지식, 교환, 관계의 체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집합적 행위자들은 자기 행동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고도 있기 때문에, 자기 행동에 대해 더 알아야 할 필요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와 행위자 사이에는 ‘계약적 관계(contractual relationship)’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과학적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연구자는 (예컨대 지식 같은) 특정한 기술과 자원을 갖고 있는데, 행위자들은 그것이 자기 행동을 명료하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연구자가 이런 자원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자들이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위자이자 분석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연구자는 그들에게 분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구자는 자신의 과학적 목표를 추구하는 동시에, 행위자들이 자신의 행동이 지닌 상호작용적 성격을 더 자각하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연구자는 행위자들이 자기 행동의 패턴 속에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도록 도울 수 있고, 그 결과로 그들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지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능한 결과는 연구자의 ‘선교사적 역할’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연구자와 행위자가 서로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그 계약적 관계가 낳는 ‘부산물(by-product)’일 뿐입니다.

 

 

#Q8. 투렌은 생태운동이 우리 시대의 ‘중심 운동’이 되어가고 있으며,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운동이 수행했던 역할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투렌이 말하는 ‘중심 운동’이라는 생각은, 운동이 마치 하나의 ‘등장인물(personnage)’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통일된 행위자처럼— 존재한다는 가정에 여전히 매달려 있습니다. ‘운동’이라는 말은, 기껏해야 대화를 편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데도, 이런 형태의 집합행동이 가질 수 있는 ‘(가능한) 통일성’의 정도를 과장할 위험이 있습니다.

투렌 자신도 지적하듯, 유럽의 생태운동은 정치적 갈등에서부터 방어적 반응, 일상생활의 규범(코드)에 대한 도전까지, 서로 다른 수준의 행동을 포함합니다. 이 운동은 의미도 여러 가지를 품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 농촌 공동체에서 근처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동원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공동체의 농민들에게 그 발전소는 전통적 생활방식에 대한 위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에서 공부하고 다시 고향 농촌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에게 그 발전소 계획은 전혀 다른 것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자율적으로 살아보려는 시도 자체에 대한 위협 같은 것이죠.

이렇게 생태 동원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의미들과 행동 형태들의 정교한 ‘콜라주(collage)는, 그들이 제도정치로부터 점점 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 때문에 더 복잡해집니다. 처음에 생태운동은 주로 정치적 행동에 관여했지만, 오늘날에는 ‘일상 생태(everyday ecology)’와 개인 정체성의 변형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신사회운동의 새로움]

 

 

#Q9. 선생님께서는 ‘신사회운동’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셨는데요, 정확히 무엇이 ‘새롭다’는 건가요?

 

저는 이 용어를 계속 쓰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Nomads of the Present』가 설명하려 했듯이, 저는 이 용어가 ‘물화(reification)’되는 방식에 점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그 의미를 더 분명히 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흔히 연대기적 의미에서 느슨하게 쓰입니다. 즉 1960년대 초반 이후로, 당시 지배적이던 집합행동 유형과는 달라진 행동 형태들이 성장해온 과정을 가리키는 식이죠. 그런데 이런 용법은 ‘새로운’ 운동들이 통일된 실체라고 잘못 가정합니다.

제가 ‘신사회운동’ 문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이론적 이의는, 그것이 신사회운동들의 ‘구성적(composite)’ 성격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즉, 현대 사회운동들이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전통적인 행동 형태까지 포함한, 여러 수준의 다층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인정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들 안에는 계급 갈등이나 정치적 투쟁에 대한 전통적 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행동 유형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현대의 운동들 안에는 행동과 의미의 ‘새로운 차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은 노동자운동을 분석할 때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개념들, 즉 새로운 가설들을 도입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핵심 가설은 이렇습니다. 오늘날의 운동들에는 네 가지 ‘새로운 구조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이 운동들의 일부 영역에서는 정보 자원(information resources)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운동들은 무엇보다 ‘기호(signs)’로 작동합니다. 이들은 물질적 재화나 자원의 생산과 분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대신 주된 관심은 ‘정보’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입지 같은 문제에 대해 ‘사실 정보(factual information)’를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정보도 있고, 여성운동이 성차별적 광고에 도전할 때처럼 ‘상징 자원(symbolic resources)’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넓은 의미의 정보도 있습니다.

둘째, 운동의 일부는 사회·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 어려운 조직 형태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그 조직은 목표 달성의 도구라기보다, 집합행동 ‘그 자체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간주됩니다. 유럽 평화운동 내부의 네트워킹, 여성운동 내부의 의식화 그룹은 이런 새로운 경향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현대 운동의 참여자들은 ‘현재 시제’로 행동합니다. 거창한 미래 비전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조직은 그런 비전을 실행하기 위한 운반 수단도 아닙니다. 오히려 운동 조직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참여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봅니다. 그들의 ‘여정(journey)’은 의도된 목적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셋째, 현대 운동의 또 다른 새로운 특징은 집합행동의 ‘잠재적(latent)’ 차원과 ‘가시적(visible)’ 차원을 통합한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 및 노동계급 정치의 전통, 특히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사적 삶과 공적 삶이 분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각 영역에서의 정서적 투자, 인지적 틀, 삶의 양식이 서로 달랐죠. 그러나 현대 운동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의미가 직접 생산되고 경험되는 사적인 삶과, 공적으로 표현되는 헌신 사이에 오히려 상보성이 있습니다. ‘다르게 살아가기’와 ‘사회를 바꾸기’는 서로 보완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신사회운동 내부에서는 잠재적 차원과 가시적 차원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더 균형 잡힌 감각이 나타납니다. 공적-정치적 행동에 참여하는 일은 ‘일시적 필요’일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활동가로 살고자 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생활하면서 때때로 공적인 활동가가 될 수 있다는 식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운동들은 복잡 사회의 ‘전지구적’ 차원에 대한 새로운 자각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이런 ‘지구적(planetary)’ 의식은 노동자운동의 더 제한적인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상호의존적인 인간-자연 세계체계 안에서 ‘인류라는 종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자각을 포함합니다. 저는 몇 년 전, 백인 중산층 미국 학생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반대해 동원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아파르트헤이트와 직접적인 정치적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이 의식의 근본적 중요성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런 새로운 ‘총체성(totality) 감각은 평화운동과 생태운동에서도 강하게 나타나며, 이 운동들은 인류와 더 넓은 세계적 우주(global universe) 사이의 연결을 강조합니다.

 

 

#Q10. 선생님께서는 현대 운동의 ‘형태’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 현실에 대한 대안적 경험이라고 보시는데요. 이건 맥루한의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테제와 꽤 가까운 것 아닌가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운동이 ‘메시지(message)’ 혹은 ‘기호(sign)’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맥루한의 논의를 끌어오는 주장인데— 운동이 보통 알려진 특정 ‘쟁점’ 그 자체를 넘어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것’ 그리고 ‘다른 것’을 표현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운동은 자신들이 놓인 구체적 맥락에서 신호를 보내고, 그 신호는 복잡 사회 안에서 ‘기본적인 사회관계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숨겨진 논쟁들을 비춰줍니다.

그 중요한 예가 바로 ‘차이(difference)’입니다. 즉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고유성을 확인하고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복잡 사회에서는 논쟁적인 쟁점이 되도록 운동이 만들어낸다는 점이죠. 이런 방식으로 운동은 복잡 체계가 이미 가지고 있는 높은 학습 능력, 다시 말해 ‘성찰성(reflexivity)’을 더 끌어올립니다. 운동은 사회가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새로운 장을 열고, 또 그것을 공론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시 운동 내부에 뚜렷한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참여자들의 주장과 활동 영역이 갖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와, 운동이 제기하는 ‘일반적·형식적 문제(general formal problems)’ 사이에 긴장이 생기는 겁니다. 이 긴장은 피할 수 없습니다. 행위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기대고 있는 특정한(particular) 언어, 행동, 맥락, 자원의 ‘수인(prisoners)’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은 여성에게 특수한 문제들을 다루는 동시에, 복잡 사회에서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여성들은 젠더화된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자기 조건의 특수성에 기대어 자신을 말하고, 지배 문화가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차이’를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동시에, 한편으로는 점점 더 통합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분화되는 사회에서 ‘차이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잡 사회에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가 커지는 만큼, —연대, 사랑, 연민을 위한— 소통의 필요도 함께 커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내부 역동과 비가시성]

 

 

#Q11. 선생님은 사회운동의 ‘비가시성(invisibility)’이 가진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시고, 주로 파트타임 참여로 이루어진 지하 네트워크를 통해 운동이 작동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관찰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운동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주변화의 징후이거나, 쇠퇴와 동력 상실의 증거— 말하곤 합니다.

 

동원도, 운동 전체도 사라질 수 있고, 실제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관적 관점은 ‘보이지 않는 단계’ 동안에도 아주 중요한 활동이 대거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회운동의 잠복된 네트워크(submerged networks)는 경험의 실험실입니다. 새로운 문제와 질문이 제기됩니다. 새로운 답이 발명되고 시험됩니다. 그리고 현실은 다른 방식으로 지각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런 경험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displayed publicly) 것은 오직 특정한 국면(conjunctures)에서만, 그리고 자원동원이론이 설명하는 조직화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개적 활동(public activity)잠복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실험실 경험’ 없이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말한 그 비관적 관점이 이 핵심을 놓치는 이유는, 운동의 ‘정치적 효과’에만 시야를 좁혀서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가면, 결국 ‘새로운 경험은 오직 지식인과 정치 조직가가 준비하고, 나중에야 공적 형태로 제시된다’는 레닌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잡 사회에서는 권력관계가 ‘마이크로칩화(microchipization)’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해, 행위자들은 일상생활의 변화가 제도적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그래서 운동의 작은 지하 네트워크(small subterranean networks)들은 기존 권력관계 위에서 실험이 수행되는 실험실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제가 이해하는 권력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과 다릅니다. 그들은 권력을 ‘주체의 구성과 관리’로 보는 일차원적 관점을 공유합니다. 반면 제가 보기에는, 복잡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현실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강력한 조직들’과, 바로 그 조직들의 자원을 이용해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행위자 및 행위자 네트워크(networks of actors)가 함께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Q12.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cultural codes)에 도전할 때, 동시대 운동들은 ‘나르시시즘적’이고 비정치적으로 변해버릴 위험에 —더 넓은 정치적 변화보다 자기만족에 더 몰두하는 위험 처해 있는 것 아닙니까?

 

말씀하신 ‘나르시시즘적 후퇴(narcissistic withdrawal)’라는 위험은 실제로 존재하고,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논의가 나르시시즘이라는 현상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을 하나로 뭉뚱그린다고 생각합니다.

한 측면은 ‘개인화(individualization)’에 대한 욕구입니다. 각 개인은 유일하고 자기결정적인 존재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대 운동들 안에서도, 사회 전반에서도, 이런 자기실현 욕구는 매우 강합니다. 그리고 교육, 기술적 숙련, 보편주의적 코드 같은 자원들이 체계적 수준에서 생산·분배되면서, 이 욕구는 더욱 부추겨집니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공동체적 정체성(communal identity)에 대한 갈망, 즉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alism)’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연대에 대한 갈망은 개인화의 가능성 자체에 의해 강화됩니다. 우리가 행동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수반하는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우리는 더 큰 안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불안정에 맞서기 위한 지지대를 적극적으로 찾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실현의 욕구는 쉽게 ‘퇴행적 유토피아(regressive utopia)’로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서로 동일해지면서 개인들이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해주는, 안전하고 투명한 환경에 대한 유토피아 말입니다. 이런 유토피아는 1960년대 미국과 다른 곳들의 운동들에서 분명히 관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개인화에 대한 더 창의적인 필요를 압도하는 쪽으로 흐르곤 했습니다. 그 창의적인 개인화의 필요는, 제한적인 청년 정책, 취약한 교육 개혁, 그리고 체계의 다른 불충분한 대응들 때문에 좌절되곤 했죠. 하지만 공동체적 연대가 자기실현을 압도하는 이런 상황은 예방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 필요'와 ‘공유된 인간적 책임’에 대한 헌신 사이의 새로운 관계 역시, 개인들이 자기결정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해주는 시민사회를 만들어내거나 강화하면서 확보될 수 있습니다.

 

 

#Q13. 랄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 같은 이들은, 동시대 운동들이 노동자 운동이 다루었던 ‘소유(property)’와 그 ‘사적 전유(private appropriation)’라는 근본 문제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선 분명히 해야 할 핵심은, 우리가 ‘소유(property)’라는 말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재산은 자연자원, 물질적 재화, 자본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소유의 형태는 ‘외재화(externalized)’되어 있었고,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ownership)은 인간에게 외부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재산은 복잡 사회에서 사라진 게 아닙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밀리밴드의 반응은 또 다른 종류의 소유가 있다는 사실, 곧 우리의 생물학적·심리학적 존재에 관한 재산을 —이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 놓칩니다. 소유의 형태가 ‘내재화(internalized)’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쟁점은 ‘누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소유하느냐’, 그리고 그 소유가 정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경향은 유전공학, 생식기술, 의학 연구 같은 것들이 —우리의 내부 자연에 대한 다른 직접적 개입들과 함께— 불러일으킨 법적·정치적 논쟁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생태운동(ecological movement)이 만들어낸 논쟁에서도 드러납니다. 생태운동은 물질적 재산을 통제하는 문제에 대한 오래된 관심을, 외부 자연과 인간의 내부 자연을 동시에 통제하려는 시도들에 관한 새로운 질문들로 확장시켰습니다.

따라서 저는 ‘소유’를 둘러싼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밀리밴드에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소유를 물질적 재화와 자본의 소유보다 훨씬 넓게 이해합니다. 이 차이를 더 탐구하려면, 제가 확장한 의미에서의 소유를 둘러싼 동시대의 갈등을 자본주의 발전기간 동안 ‘재화(goods)의 소유’을 둘러싼 논쟁들과 비교해보는 것이 흥미로울 겁니다. 그런 비교는 전통적인 소유 정의가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동시대적 소유 형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깊게 해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1930년대 이후 전개되어 온 논쟁을 —재산의 ‘소유 대 통제’, 집합적 소비의 성장, 자본주의 성격의 변화— 더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다국적 기업의 권력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공유재(common goods)를 사적으로 전유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자연환경과 개인의 생물학적·심리학적 존재 모두에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더 분명해질 겁니다. 여기에는 개인들이 느끼는 유전적 운명 감각, 성 선택, 소비 양식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Q14. 선생님께서는 동시대 운동과 초기 근대 노동자들의 집합행동 사이의 ‘연속성(continuities)은 어떻게 보시나요? 당시 노동자들의 운동에는 ‘비가시적 행동 네트워크(invisible action networks)’에 기대어, 협동조합(co-operatives), 공제회(mutual aid societies), 노동조합(trade unions) 같은 새로운 ‘파열적(disruptive) 조직 형태’의 실험이 있었잖아요.

 

저는 ‘신사회운동’이 이런 집합행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박물관에 전시해 둔 것처럼 그저 ‘보존’하는 게 아닙니다. 그 전통을 활용해 새로운 문제에 맞서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답을 내놓습니다. 역사적 연속성은 오늘날 사회운동 안에서도 늘 관찰됩니다. 핵심은 동시대 행위자들이 전통의 요소들을 ‘완전히 새로운 요소들’과 종합(synthesizing)해, 그것들을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느냐입니다.

집합행동에 참여한다는 일은 언제나 말씀하신 ‘파열(disruption)’과 ‘방향감각 상실(disorientation)’의 경험을 수반합니다. 동시대 운동에서는 그것이 특히 더 첨예합니다. 이런 운동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과정들, 긴장들, 갈등들로 가득 차 있고, 그 모든 것이 개인들이 그 운동에 헌신하는 일을 위험하고 불확실하게 만듭니다. 제가 설명했듯이, 운동을 하나의 ‘인물(character)’ 혹은 ‘페르소나(personnage)’로 보는 이미지는 오해를 낳습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운동에 관여한다는 경험은 ‘일시적(temporary)’이면서 ‘매우 취약(highly fragile)’하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의 헌신의 질과 지속 기간은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 크게 좌우됩니다.

예컨대 ‘밀라노 연구 프로젝트’에서 저는 청년운동 내부 집단들 사이에 자원의 이용 가능성이 크게 엇갈린다는 점을 관찰했습니다. 어떤 집단들은 내부 연대와 표현적 충동 대한 기타 치기와 조인트 피우기— 강조를 공적 행동으로 번역해내지 못해 주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내부 붕괴(implosion)를 겪었는데, 제한된 개인적 기술과 자원 때문에 기타 치기와 체제에 대한 반대를 바깥세계에서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집단들은 더 잘 해냈습니다. 예를 들어 비디오 작업을 하던 젊은이들은 집단 안에서 특정한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것이 그들을 정보 생산의 바깥세계와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공적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고, 심지어는 전문가가 되어 운동을 아예 완전히 떠나기도 했습니다.

 

 

#Q15. 그렇다면 집합행동의 비용, 위험, 내부 긴장, 자원 불평등, 그리고 다층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고려할 때에도, 사람들은 왜 참여하나요?

 

이건 아주 중요하지만 —정말 방대한— 질문입니다. 그럴듯한 답을 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설명 수준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만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개인들이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잡 체계’의 모순적인 요구에 노출된 특정 사회 부문(social sector)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구조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모순적인 사회 부문에 속한 모든 개인이 실제로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자원동원이론가들이 강조하듯 또 다른 종류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설명은 참여의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개인들에게 ‘특정 자원’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가와 관련됩니다. 예컨대 네트워크에 이미 가입해 있었던 경험 같은 자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자원은 언제나 개인이 속한 특정 사회 부문에 의해 조건지어집니다. 예를 들어 모든 여성은 모순적인 압력과 의무에 노출되어 있지만, ‘여성으로서’ 집합행동에 참여할지 여부는 교육 수준, 고용에 대한 접근, 과거에 좌파 정치 그룹에 가입했던 경험 같은 자원에 달려 있습니다.

셋째, 개인의 헌신(commitment) 심리와 관련된 설명 수준이 있습니다. 이 수준은 자주 과소평가되거나 때로는 잊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근본적입니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궁극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참여하기 때문이고, 단지 ‘학생’이어서, ‘여성’이어서, ‘젊어서’, ‘흑인’이어서, 또는 ‘도시 거주자’여서만 참여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Corpi Estranei』(1984)에서 개인 변인의 중요성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제 임상 작업에 바탕을 둔 이 책은 개인들이 왜 운동에서 이탈하고 치료적 조언을 구하게 되는지에 대한 깊은 심리적 이유를 분석합니다. 또 사람들이 집합행동에 관여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수준을 때로 혼동한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의존적인 수준들을 분석적으로 분리해보는 일이, 자신의 집합행동에 대한 헌신이 부분적으로는 깊이 개인적인 이유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개인들이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그 바탕 위에서, 그 개인들이 자신의 사회적 활동을 —심지어 집합행동에의 관여까지도— 다시 재개할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Q16. 선생님은 신사회운동의 중요한 특징으로 내부 연대의 구축을 말하셨죠. 그런데 운동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말하는 사람들에 맞서, 운동이 이질적이고 취약하며 복잡하다는, 말하자면 척추 없는 성격을 강조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제 초기 글에서는 갈등, 그리고 체계의 한계를 깨뜨린다는 말과 함께,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사회운동을 집합행동의 특정한 형태로 규정하곤 했습니다. 그때 제게는 집합행동을 둘러싼 논의에 따라붙는 이론적 혼란을 넘어서는 게 중요해 보였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집합행동 형태들을 한데 뭉뚱그려서, 결국 모든 것을 서로 비슷한 것으로 정의해버리는 경향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곧, 연대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사회운동은 다면적인 현실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집합 행위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하나의 단일체로 규정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됐죠. 그래서 지금 제가 연대라는 말을 쓸 때는, 그걸 이념형(ideal-type)으로 씁니다. 연대는 역동적이고 불안정한 현실을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여러 행위자들 사이의 강렬한 상호작용, 협상, 갈등, 타협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고 제 연구가 확인해주듯이, 보통은 대변인들, 즉 다른 참여자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이념가들이 단일성을 가장 강하게 강조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운동의 직물 같은 내부에는 만성적인 긴장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집합 행위자들은 연대라는 끝나지 않는 게임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걸 결정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두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라는 감각을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은 여러 이유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효과적인 리더십, 작동 가능한 조직 형태, 혹은 강한 표현적 행위의 비축분 같은 것들 때문이죠. 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고, 그 경우 집합행동은 붕괴합니다. 사회학적 분석의 과제는 연대라는 게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도정치와의 거리]

 

 

#Q17. 선생님 말씀으로는, 신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특정한 종류의 혁명정치, 즉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변형하려는 레닌주의 모델뿐 아니라 더 전통적인 좌파 정치 전략도 거부한다는 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운동들의 문화적·정치적 잠재력을 생각할 때, 기존의 좌·우 구분은 이제 낡았다고 말하는 건가요?

 

19세기 유토피아들 가운데 많은 것들의 꿈은 사회적 행위자들을 국가를 변형하는 프로젝트에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 행위자(social actors)들은 시민사회의 동력이자, 새로운 형태의 정치권력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로 간주됐죠. 하지만 오늘날 제 생각에 이런 관점은 낡았습니다. 시민사회 내부의 사회적 행위 양식과 국가 제도 내부의 정치적 행위 양식 사이에 점점 더 큰 괴리가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행위는 선별의 과정, 그리고 그에 따라 압력, 경쟁, 계산, 대표를 통해 결정을 만들고 실행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반대로 사회적 행위는 그물망 같은, 다면적인 경험이고, 점점 더 개인적·대인적·집합적 삶의 의미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레닌주의의 문제는 사회적인 것을 전부 정치적인 문제로 축소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회적 행위자, 사회적 판단, 사회 현상에 대한 지식이 모두 정치적 용어로 압축됩니다. 이건 극단적인 환원주의지만,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대개 집합행동을 정치체제에 미치는 영향으로 평가하곤 하죠. 사회운동과 정치권력·갈등의 관계를 이렇게 단락시켜버리는 방식은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방식은 사회운동 내부에서 작동하는 독자적인 과정들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고, 동시에 사회운동이 정치체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도 약화시킵니다.

제가 레닌주의적 환원주의에 불만을 갖는 이유는, 왜 제가 사회운동에 좌·우라는 전통적 구분을 적용하는 데 회의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좌·우 구분은 정치의 장에서는 아마도 여전히 유효할 겁니다. 정치적 의미에서 좌파란 우파의 과거지향적 보수주의에 반대하는 것이고, 인권의 확대, 시민에 대한 법적 보장, 더 큰 평등과 민주주의, 정치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뜻하니까요. 문제는 이런 기준들을 사회운동에 적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집합행동의 이질성은 이런 단순화된 범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내가 당신에게 설명하려 했듯이, 신사회운동의 많은 특징은 진보적/보수적, 미래지향적/과거지향적 같은 말로는 아예 묘사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적 의미에서, 이런 낡은 용어들은 이제 쓸모가 다한 겁니다.

 

 

#Q18. 왜 새로운 운동들은 공식 정치와 거리를 두나요? 정당, 정부, 국가 제도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반정치적 불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요?

 

나는 동시대 운동들의 반정치적(anti-political) 성격을 말하기보다는, 그들의 전정치적 성격과 메타정치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운동은 일상생활의 전정치적(pre-political)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그 비공식적 네트워크(informal networks) 안에서 집합적 행위자들은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그것을 시험해보는 실험실 작업에 협력합니다. 하지만 운동에는 메타정치적(meta-political) 차원도 있습니다. 운동은 정치적 결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복잡 사회의 몇 가지 근본적 딜레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론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껏해야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해법만 가능한 일반적 문제들에 직면해 있음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재 이용 가능한 핵에너지 지식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이자 궁극적인 전지구적 재난이라는 방식이 아니라면 말이죠. 평화운동과 생태운동이 충분히 공론화해온 핵발전과 핵무기의 명백한 위험을 고려하면, 핵 지식을 없애는 것도, 그렇다고 그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두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건 정치 권력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끝내 남아 있을 딜레마의 한 사례입니다.

또 다른 예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과 환경에 대해 행사하게 된 기술적 힘이 커지면서 생겨나는 결정적 딜레마입니다. 이 힘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간 생물학과 자연 생태계의 경계 안에 필연적으로 뿌리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전능함을 선택할 수도 없고, 완전히 자연적인 존재로 되돌아가는 퇴행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필연적으로 끼어 있고, 정치적 결정은 이 문제를 결코 완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동시대 운동들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딜레마를 자각하도록 도와왔습니다. 운동은 정치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이 협상·의사결정·행정적 통제로 환원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비정치적 형태의 행위들이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도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Q19. 당신은 다른 곳에서 폭력이 사회운동에서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설명한 적이 있죠. 그런데 요즘은 왜 폭력이 그렇게 드문가요? 왜 동시대 운동들은 주로 시민불복종과 다른 비폭력적 행동 형태에 의존하나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과거에 정치 권력자들이 폭력을 과도하게 쓰거나 난폭하게 사용하면, 대개 그에 맞서는 쪽의 맞대응 폭력을 불러왔습니다. 어느 정도는, 오늘날의 다원주의적 정치체제들이 이런 오래된 규칙을 학습했습니다. 정치권력이 더 교묘해진 거죠.
둘째로, 과거의 투쟁과 폭력은 정치체제를 더 민주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운동과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 공개적이고 폭력적인 정면충돌이 오늘날 덜 흔한 이유는, 서로의 차이를 협상할 수 있는 다른 대안적 수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운동들의 내부 문화 자체가 폭력 사용에 분명히 반대하는 쪽에 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주의 및 노동계급 문화와 대비하면 차이가 뚜렷하죠. 그 문화는 사용자와 국가에 대한 폭력적 대결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고, 그 이론들 중에는 폭력이 필요하고 불가피하다고까지 전제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동시대 운동들은 이런 오래된 전제들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그들은 거창한 계획과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현재에 머무르며, 그래서 평화주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국가와 잦은 공개적 정면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폭력이 소멸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폭력은 아마도 운동들의 그림자 같은 이면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폭력과 사회운동 사이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환멸을 느끼고 조급해진 개인들, 그리고 고립된 소규모 집단들이 벌이는 테러 활동이 오히려 더 일어날 가능성도 커질 수 있습니다.

 

 

#Q20. 선생님의 글을 보면, 운동의 요구는 협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정치적 매개가 필요하고, 시민사회 안에 새로운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저는 공론장(public spheres)을 확장하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이 동시대 운동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론장을 넓히고 공고화하는 데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탈산업적 민주화 과정은, 근대 초의 권리·시민권·평등 원리 위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운동들은 시민사회의 비가시적 네트워크(invisible networks) 속에서의 존재와, 일시적 동원(temporary mobilizations)을 통해 공적으로 가시화되는 존재라는 이중적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독립적인 공론장이 정착되면, 운동이 중요하다고 보는 주제와 딜레마를 사회 전체에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정치 행위자들도 운동이 보내는 메시지를 더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공론장은 어느 정도 이미 존재합니다. 하지만 복잡 사회에서는 특히 세 영역에서 더 발전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첫째는 대학, 문화재단, 연구기관 같은 지식 생산 기관입니다. 지식은 복잡 사회의 핵심 자원입니다. 지식은 전문가들이 생산하지만, 기업 권력과 국가 권력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그것을 전유합니다. 이런 행위자들은 지식 생산 기관 내부에 그 목적을 위해 마련된 기구들을 통해 서로 더 공개적으로 조정하고 협상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집합적 소비 영역입니다. 교통, 주거, 보건, 그리고 다른 공공서비스 같은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일상적 필요와 요구가 기존의 정책결정 기구와 더 자유롭게 접속하고 맞닿을 수 있도록 공적 공간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커뮤니케이션 매체, 즉 언론·미디어 영역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당장 내놓을 만한 완성된 해법도 없습니다. 그래도 미디어 내부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대면하고 협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미디어의 접근성과 응답성을 더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말하는 이 세 정책 영역의 공론장은 꼭 갈등의 장으로만 작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당이 지배해서도 안 되고, 선거에서의 성공이 판단 기준이어서도 안 됩니다.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반드시 정면충돌하지 않고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중립지대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은 법적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사회운동의 간헐적인 동원 방식에 맞게, 태스크포스나 위원회 같은 임시적 대표 형태, 그리고 이탈리아 녹색당이 말하는 '생분해성 조직(bio-degradable organizations)' 같은 것들도 분명 포함될 겁니다.

 

 

#Q21. 이런 공론장이 발전하려면, 사회운동을 정식화하고 힘을 실어주는 데 정당이 최우선이라는 통념과는 급진적으로 결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우선, 정당이 수행하는 기능은 다른 조직들도 수행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노동조합, 압력단체, 자발적 결사체들도 여론을 안정시키고, 사회적 요구를 대표하고, 장기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운동이 수행하는 기능은 정당의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당과 다른 정치 기구들은 대체로 복잡 사회에서 거시적 수준에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반면 공론장의 역할은 다릅니다. 공론장은 운동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말로 분명히 표현하게 해주고, 복잡한 체계 속 권력관계를 더 눈에 보이게 만듭니다.
이 체계에서 권력은 겉으로는 중립적이거나 기술적인 의사결정 절차라는 장막 뒤에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론장이 수행하는 이런 비판적 기능은 필수적이고, 지금 시기에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능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회운동의 생성과 소멸]

 

 

#Q22. 새로운 사회운동에 호의적인 관찰자들과 지지자들은 종종 그 운동들이 취약하고 정치적·사회적 억압에 약하다는 점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운동들이 사실 복잡 사회에서 안정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구성요소라고 말합니다.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닙니까?

 

저는 사회운동이 복잡 사회의 지속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특징이라고 봅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사회들이 이 운동들이 만들어내는 개인적 참여와 집합적 동원의 형태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능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저는 보통 이런 용어를 쓰지 않지만―, 운동의 하위체계는 복잡한 체계의 상시적 요소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도로 중앙집중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복잡한 이런 체계들이 집합행동이 가능해지는 공간의 발달을 촉진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체계는 여러 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갖춘 조직과 비슷합니다. 그 메인프레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터미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됩니다. 중앙의 컴퓨터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주변부의 터미널들이 필요합니다. 터미널이 제공하는 정보 자원이 없으면 컴퓨터는 작동할 수 없습니다.
복잡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기능하려면 개인적·집합적 동기가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합니다. 이 요구조건이 사회운동이 자라나는 토양입니다. 사회운동은 복잡한 체계에서 중심과 주변 사이에 깊이 양가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체계의 중심이 권력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으며 주변과의 협력 속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활용합니다. 이 구조적 긴장은 복잡한 체계의 심장부에 놓여 있고, 그래서 사회운동은 그 사회의 문화적 코드와 권력관계를 문제 삼는 역할을 계속 수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회운동이 사라지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삶이 단순한 재생산의 수준으로 영구히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인간은 먹고 자고 번식하고 살아남는 것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방식을 넘어서는 것에도 동기부여됩니다. 오늘날 이런 사실에 대한 자각이 커지는 이유는 ‘신의 의지’나 ‘역사의 법칙’ 같은 초사회적 원리들이 사회를 붙잡아두는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 자체가 자신이 우연적(contingent)이며 지속적인 재구성이 필요(need of continuous reconstruction)하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사회운동은 이 우연성의 감각(sense of contingency)을 먹고 자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강화합니다. 사회운동은 한 종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는 능력에 대한 자각을 높여 왔습니다. 우리는 전례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이전의 어떤 사회 형태도 자기 자신에게 이만한 권력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미래는 거의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적 삶이 지금껏 이렇게 위험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사회운동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갖게 된 이 막강한 힘의 징표이며, 동시에 그 힘을 책임 있게 행사해야 한다는 우리의 막중한 의무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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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Melucci, A., 1989, Nomads of the Present: Social Movements and Individual Needs in Contemporary Society, Vintage.

Tilly, C., 1978, From Mobilization to Revolution, Longman Higher Education.

Tilly, C., L. A. Tilly, R. H. Tilly, 1975, The Rebellious Century: 1830~1930, Harvard University Press.

Touraine, A., 2000a, Can We Live Together? Equality and Difference, Polity.

Touraine, A., 2000b, "A Method for Studying Social Actors",  Journal of World Systems Research, 6: 9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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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송준규 zingari.JQ@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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