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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s-Pritchard, Edward E., 1961, “Anthropology and History”, 1963, Essay in Social Anthropology, The Free Press of Glencoe INC, .pp.46~65.
인류학 그리고 역사학
1961
E. E. 에반스-프리차드
이 강연은 맨체스터 대학교 Simon Fund for the Social Sciences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1950년, 저는 옥스퍼드에서 마레트(Marett) 강연을 진행했습니다.[1] 강연에서 저는 사회인류학이 자연과학보다는 특정 형태의 역사학에 더 가깝다 생각한다고 말했었죠. 항의가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저는 분명히 반(反)역사적 편견(anti-historical prejudice)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역사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말리노브스키(Malinowski)와 래드클리프-브라운(Radcliffe-Brown)의 영향력이 여전히 지배적이었지만, 이외 다른 지역에서도 역사적 방법론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적어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뒤르켐(Durkheim)은 반역사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진화적 유형론 연구는 진정한 역사라기보다는 발전적 연구 분야에 속했기에, 비역사적(ahistorical)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역사에 대한 태도는 모호했으며,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 미국 인류학도, 겉으로 보이기에는 다르지만, 크로버(Kroeber)가 말했듯이 본질적으로 '반역사적 경향(anti-historical in tendency)'이 있었습니다.[3]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문화영역(Kulturkreislehre) 학파 역시 표면적으로는 역사적 형태를 띠었지만, 클럭혼(Kluckhohn)이 지적했듯이 그 개념은 주로 역사에서가 아닌 자연과학, 예를 들어 층(layer) 또는 계층(strata)의 기본 개념에서 기인했습니다.[4]
역사에서 멀어진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학문을 선도한 선구자들과 창립자들은,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을 필연성(inevitability)으로 잘못 이해하여, 인간 모든 사회가 정해진 연속적 단계를 거친다는 역사적 발전 법칙을 수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를 시도하지 않은 학자들―e.g.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 존 밀러(John Millar), 헨리 메인(Sir Henry Maine), 로버트슨 스미스(Robertson Smith)―조차도, 어떤 제도를 그 기원 또는 최소한 그 선행 요소에 의해 설명하려 했으며, 이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의 주요 특징입니다. 이렇게 (소위) 진화 이론(evolutionary theories)들을 비판한 (역시 소위) 기능주의자들(functionalist)은 그 이론들의 불충분함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족학적 사실(ethnological facts)을 다루는 방식에서 유사한 접근법이 그들 자신의 절차에서 거의 숨겨지지 않고 드러납니다.
한때는 통시적 법칙(diachronic laws)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공시적 법칙(synchronic laws)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공시적 법칙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이 통시적 법칙임을 제대로 인식한 건, 제가 보기에 콩트(Comte)인 거 같습니다. 알렉산더 스포어(Alexander Spoehr)는 이를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기능적 의존성(functional dependence)의 진정한 의미는 한 변수가 변화하면 종속 변수도 변화한다는 점에 있다.”[6]
양측의 혼란은, 제가 보기에는, 자연법칙(natural law)과 규범법칙(normative law)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여기엔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란을 더했던 또 다른 요인은, 기능주의자들이 진화론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동안 (다시 소위) 전파론자(diffusionists)들이 이미 그들을 비난하며 공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파론자들은 사회적, 문화적 발전이 진화론적 법칙들의 작동이 아닌, 민족 간의 접촉과 아이디어, 기술, 제도의 차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진화론적 법칙들이 어리석은 추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확산론자들 역시 때로는 비판적 사고가 부족하고 독단적이었으며, 그들의 반대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법칙들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전파론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 연구 방법을 사용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증거 규칙에 대한 무관심은 역사로부터의 또 다른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진화론자들과 전파론자들 모두를 비판했던 기능주의자들은 그들이 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비판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비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능주의자들은 역사를 버리고 법칙의 추구를 유지했는데, 그 법칙의 추구가 종종 역사를 나쁘게 만든 바로 그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능주의자들은 역사 연구에 대해 무지했으며, 자신들이 공격하던 부정확한 역사가 전체 역사학에 전형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어떤 형태의 역사적 설명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사회인류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일반화하는 학문으로 간주하고, 역사학을 특정 사건을 다루는 학문으로 간주하는 방법론적 구분으로 정당화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가 단순히 연속적인 독특한 사건의 기록일 뿐이고, 사회인류학이 일반적 명제를 다룬다는 가정 하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날 사회인류학자들은 역사가들이 일반화하는 것보다 더 일반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법칙에서 연역하거나, 사실을 법칙의 사례로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인류학자들이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본다면, 역사학자들 또한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유형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대략적으로나마, 그리고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입니다. 먼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서술적 역사(narrative histories)를 쓰는 역사학자들, 즉 이야기 형식의 역사(histoire-historisante), 전쟁사, 주로 정치적 성격의 위대한 사건들의 역사를 쓰는 이들을 지칭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비코(Vico), 보쉬에(Bossuet), 헤겔(Hegel), 딜타이(Dilthey)에서 오늘날의 슈펭글러(Spengler)와 토인비(Toynbee)에 이르기까지, 역사 철학자들(philosophers of history)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에 대해 아론(Aron) 교수가 비탄에 차 언급한 바도 있습니다.[6]
내가 말하려는 이들은 '사회학적 역사학자(historiens-sociologues)'입니다. 이들은 사회 제도, 대중 운동, 그리고 중요한 문화적 변화에 주된 관심을 두며, 규칙성, 경향성, 유형, 그리고 전형적 순서를 탐구합니다. 항상 제한된 역사적·문화적 맥락 내에서 연구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언급되겠지만, 메이틀랜드(Maitland), 비노그라도프(Vinogradoff), 피렌느(Pirenne), 블로흐(Bloch), 뤼시엔 페브르(Lucien Febvre), 그리고 글로츠(Glotz)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런 역사학자들은 '유기체(organisms), 패턴(patterns), 복합체(complexes), 관계 네트워크(networks of relations), 이해 가능한 전체(intelligible wholes), 관련성(Zusammenhang), 조화(ensembles), 응집 원칙(principles of coherence), 전체(un tout)' 같은 개념을 우리처럼 대담하게 논의합니다. 역사는 사건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연결입니다. 사회학적 역사학자들 또한 실제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모델(models)과 이상형(ideal types)을 사용합니다. 마르크스(Marx)와 베버(Weber)가 그러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철학적 역사학자로 간주된다고 비판한다면, 매루(Marrou)를 따라 퓌스텔 드 쿨랑주(Fustel de Coulanges)를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치비타스(Civitas)', '봉건제(feudality)', '계급(class)', '자본주의(capitalism)', '혁명(revolution)' 등은 모두 이상적 유형을 전제로 하는 일반적 추상개념입니다.
사실 어떠한 추상(abstraction)도 일반화(generalization)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도 완전히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한 번만 벌어졌지만, ‘전투’라는 범주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범주로 간주될 때 비로소 이해 가능하며, 따라서 설명 가능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에게 '이해가능성은 곧 설명(intelligibility is explanation)'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카시러(Cassirer)는 역사적 지식을 의미론(semantics) 혹은 해석학(hermeneutics)의 한 분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8]
‘일반화(generalizing) 학문’과 ‘특수화(particularizing) 학문’이라는 주제의 또 다른 버전은, 사회인류학이 역사보다 훨씬 더 비교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자연과학이 유사성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역사학이 차이점을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회학적 역사학자들과 사회인류학자들 모두 어떤 사건이 고유성과 일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석할 때 양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실의 구체성이 상실된다면, 그것에 대한 일반화는 너무 일반적이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몇몇 범주, 예컨대 ‘금기(tabu)’, ‘토테미즘(totemism)’, 그리고 최근에는 ‘종족(lineage)’라는 개념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특정 유형 혹은 가정된 유형의 현상에 대한 일반적 진술들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그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반면, 사건들을 일정한 규칙성과 지속성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않고, 특정 유형의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 사건들은 많은, 어쩌면 모든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존 왕(King John)과 그의 귀족들 간의 갈등은 동일한 봉건제도가 존재했던 다른 국가들에서 군주와 귀족 간 관계를 알 때, 그리고 또한 헨리 1세,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와의 귀족들 간 관계를 알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이 갈등을 특정 사회 유형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주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 왕과 로버트 피츠 월터(Robert Fitz Walter)라는 개별적 인물의 구체성은 그들이 특정 사회적 관계 집합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간주될 때 그 중요성이 크게 줄어듭니다.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존 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상황이 일부 다른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는 상황이 동일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유한 특징을 제거한 역사적 사실은 일시성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가는 사건이나 일종의 우연이 아니라, 마치 시간의 흐름 바깥으로 끌려 나온 듯 개념적 안정성을 갖추고 사회학적 명제로 자리 잡습니다. 예를 들어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헨리 8세의 화폐 가치 절하와 토머스 그레셤 경(Sir Thomas Gresham)의 저지방 활동이 가진 개별적 특수성을 초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회인류학이 역사와 단절(social anthropology of its breach with history)하면서 초래된 결과들에 대해 논의하려 합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를 간략히 열거하겠습니다.
1. 인류학자들은 문서 자료를 사용하는 데 있어 비판적인 태도가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프레이저(Frazer)는 그의 저서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면서, 그 자료들의 권위를 어떠한 근거로 받아들이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에서 종교에 관한 다른 이론가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지만, 자신이 의존한 호주 원주민에 대한 문헌 저자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예방법은 우리가 지나치게 신뢰하는 현장 연구 모노그래프(monographs)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사실, 엄격하지만 다소 상상력이 부족한 역사적 방법론의 심판자들인 랑글루아와 세이노보스(Langlois & Seignobos)가 요구하는 기준을 우리 대부분은 충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9]
사회인류학자가 에스노그라퍼(ethnographer)의 역할을 수행할 때 직접 관찰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지곤 합니다. 그러나 비교 연구를 시작할 때는 역사학자와 마찬가지로 문서에 의존해야 합니다. 역사적 비판의 기술(techniques of historical criticism)이 중요하다는 점은 보다 역사적 관점이 강한 민족학자들(historically-minded ethnologists)―특히 독일 학자들―에 의해 인식되었다는 점을 공정하게 추가로 언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인류학자들은 이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2.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한 사람들의 과거를 역사 기록과 구전 전통에서 재구성하는 데 매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경우가 드뭅니다. 이는 이른바 '골동품 수집(antiquarian)' 같은 관심사로 간주되었으며, 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아는 것이 제도의 기능적 연구에는 관련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원시 사회의 경우, 인류학자가 그들의 토착 제도(indigenous institutions)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문서와 구술 기록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심지어 1880년대 초기에 활동했던 로스코(Roscoe)와 같은 관찰자조차도, 부간다(Baganda) 왕들의 법정과 행정 기능에 대해 구술 기록을 기반으로 한 재구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야 했습니다.[10]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인류학자들이 원시 민족들의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작업은 흔히 '역사적 배경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리는 것'을 넘지 못했습니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아직 역사적 자료를 사회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추가적으로, 나는 가능하다면 구전 전통을 가능한 본문 형태로 기록하도록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는 자료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방언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며, 에스노그라퍼(ethnographer)가 선택과 해석하는 방식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에스노그라퍼가 실질적으로 해당 언어와 그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3. 이와 같은 재구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럽 지배 이전의 원시 사람들들이 다소 정적(static)인 상태였다는 인상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인상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사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사실이 아닙니다. 아프리카가 제공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 중에서, 저는 줄루(Zulu), 바수토(Basuto), 바로체(Barotse), 아잔데(Azande), 망베투(Mangbetu)를 언급하겠습니다. 세계의 일부 지역,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 북아메리카, 그리고 북극 지역에서는 문서 증거가 있어서 수 세기에 걸쳐 어떤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적어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를 알지 못한 채로 사회를 이중적으로만 바라보게 되면, 잘못된 관점을 초래합니다. 복잡한 현상을 지능적으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we have to know not only what it is, but also how it came into being)"던 보아스(Boas)의 말에 동의합니다.[11]
저는 에스노그라피적 역사(ethnographical history)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노그라피 연구(ethnological research)는 약간 다른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이 주제와 관련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점은, 사피어(Sapir)가 경고했듯이, 그러한 연구가 엄격한 증거 규칙의 준수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12] 예를 들어, 타일러(Tylor)가 입증한 마다가스카르와 인도네시아 간의 접촉, 또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에 몇몇 중요한 아프리카 식물들이 아메리카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이 그 사례에 해당됩니다.
4. 사람들의 전통적 역사(traditional history)는 또 다른 이유에서 중요한데,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고의 일부를 형성하며, 따라서 인류학자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사회적 삶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 예를 들어 워털루 전투의 영향과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구전 또는 문서적 전통으로 표현되면서 해당 사람들의 삶에서 발휘하는 역할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는 'Geschichte'와 'Historie', 그리고 'storia'와 'storiografia'의 차이에 같은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두 번째 의미에서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모든 역사가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다"라고 말했지만,[13] 제 생각에는 이는 콜링우드(Collingwood)[14]가 더 잘 설명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사고 맥락 속에 담긴 한 부분으로 인식되며, 따라서 현재에 속하면서도 독립적으로 구분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과 과거의 인류학자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 부족(lack of interest in history)으로 인해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 않았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전통이 풍부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빈약할까? 약 70년 전, 코링턴(Codrington)[15]은 "태평양 사람들 중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 분파의 차이점, 폴리네시아에는 눈에 띄게 풍부한 원주민 역사와 전통이 있지만, 멜라네시아에는 그러한 역사와 전통이 현저히 없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사우스올(Southall) 박사는 최근 알루르(Alur) 사람들이 나일강과 알버트 호수 서쪽에 있는 이웃 사람들보다 과거 사건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훨씬 크다고 관찰했지만,[16] 역시 그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질문은 전통의 내용과 관련됩니다. 어떤 종류의 사건이 기억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회적 결속이나 권리(e.g. 가족이나 씨족의 토지 권리 또는 혈통 계승권)와 관련이 있는지입니다. 말리노브스키[17]는 이 문제에 일부 주목했지만,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았고 '역사'보다는 '신화'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렇다면, 전통 속에서 참조점으로 사용되는 기억법(mnemonics)은 무엇일까요? 이는 지형적 특징(예를 들어, 사람들보다는 장소와 역사가 결합되는 경우가 흔한데, 예를 들어 드 칼론느(De Calonne)[18]가 이 점을 지적했으며, 프레데리카 드 라구나(Frederica de Laguna)[19]는 알래스카의 틀링깃 족(Tlingit)을 언급하며 사람들이 역사로 지리적 개념을 이해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회 구조적 특징(계보, 연령 집단, 왕위 계승), 그리고 인공물(상속품) 등이 있습니다.
또한, 환경 조건이 전통과 민족의 시간 감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중앙아프리카 여행자들은 석조 구조물이 없는 환경에서, 침입·이동·점령 같은 사건의 물질 증거가 흰개미 때문에 인해 몇 년 내 사라져버리며, 사건의 증거와 함께 그 기억 또한 사라진다고 언급했습니다.
역사적 전통을 연구하는 학자는 세 가지 역할을 맡습니다: 기록자, 역사학자, 사회학자입니다. 그는 민족의 전통을 기록하고, 그것들의 역사적 타당성을 평가하며 시간 표기를 부여합니다(이 단계에서 기록은 주석적 비평이 포함된 수도사 연대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것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sociological interpretation)을 수행합니다.
5. 단순 사회(simpler societies)의 과거에 대해 인류학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신화·전설·일화·민속학을 명확히 구별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말리노프스키[20]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신화가 다뤄지는 방식을 잠깐 살펴봅시다. 인류학자들이 과거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전통(tradition)'이라는 포괄적인 단어로 포함시키지 않을 때, 대개 '역사(history)'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다소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지칭하고, '신화(myth)'로는 가능성이 없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와 역사는 중요하게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증거에 호소하거나 자연 과학의 법칙들에 따라 증명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는 사실일 수 있지만 신화적 특성을 가지며, 어떤 이야기는 거짓일지라도 역사적 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큰 문제에 대해 더 다룰 수는 없고, 신화의 몇 가지 독특한 특성을 간단히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화는 일련의 사건의 연속에 주목하기보다는 상황의 도덕적 중요성에 중점을 두며, 따라서 종종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신화는 역사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융합하여 재현(re-enactment)됩니다. 신화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거나 초월적, 초시간적 존재로 간주되며, 역사의 시간 바깥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신화가 역사적 시간 안으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여전히 신화는 특정 시간이나 공간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전형(archetype)이라는 점에서 초시간성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많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성이나 심지어 부조리함은 역사적 기록에서처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순진한 믿음으로 상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화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인간의 경험 바깥에 있다는 점 때문에, 신화는 의지와 상상력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그것이 속한 문화의 사람들에 의해 역사와 다르게 간주된다는 점에서 역사와 다릅니다. 이들은 역사적 사건과 신화적 사건을 동일한 종류의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 중 아무도(연극 무대 위에서만 제외하고)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 날카로운 눈의 아테나, 혹은 민첩한 사자인 헤르메스를 실제로 본 건 아니었으니깐요.
6. 이제 인류학자들이 역사를 무시해 발생하는 또 다른 종류의 결과들로 논의를 전환하겠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을 다루며, 그러한 사실의 방대한 양이 역사학자들의 자료집과 기록, 그리고 그들의 일반적이고 특수한 역사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동일한 종류의 모든 또는 대부분의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화를 시도하려면, 설사 그것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원시 사회에 관한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을 검증하기 위한 선택적 활용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데이터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인류학자가 현대의 원시 사회를 연구하며 발견한 것과 유사성이 높은 특정 시기의 역사는 용어와 개념을 제공하며,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큰 가치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시기로는 예를 들어 메로빙거(Merovingians)와 카롤링거(Carolingians) 시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은 어떠한 사회학적 역사학자들 또한 이 점에 해당됩니다.
여기에서 내가 학생 시절에 익숙했던 저작들 중 이미 언급했던 이외의 몇몇 이름들을 예로 들겠습니다. 귀조(Guizot), 기르케(Gierke), 코발레프스키(Kovalevsky), 자비니(Savigny), 프티-뒤타이유(Petit-Dutaillis), 알프레드 짐머니(Alfred Zimmern), 간쇼프(Ganshof), 피히터나우(Fichtenau); 그리고 근대시대 역사학자로는 자본주의와 칼빈주의에 관한 막스 베버와 토니(Tawney), 엘리자베스 시대의 부르주아 문화를 연구한 라이트(Wright), 그리고 마을, 도시, 숙련된 노동자에 대한 연구의 해먼즈(Hammonds)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글과 가장 가까운 역사는 초기 시대의 역사로, 부분적으로는 내가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이며, 또한 대략적으로 보아 사건과 개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당시의 저자들이 우리가 하듯이 제도와 사회 구조를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내가 언급한 이름들 중 상당수는 법률가들로, 특정 사례들을 일반 원칙과 연계시키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회인류학의 창립자라고 여기는 몇몇 인물들―메인(Maine), 바호펜(Bachofen), 맥레넌(McLennan), 모건(Morgan)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사회학자와 역사가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튜턴(Teutons)의 역사가인 그룬베크(Gronbech), 히브리(Hebrews) 역사가인 페더슨(Pederson), 켈트(Celts) 역사가인 앙리 위베르(Henri Hubert) 등이 있습니다. 경제사가―로스토프체프(Rostovtzeff), 시미안드(Simiand) 등―, 사상사가―트뢸치(Troeltsch), 니그렌(Nygren) 등―, 예술사가―하우저(Hauser)―, 주로 프랑스계인 역사 지리학자들―비달 드 라 블라슈(Vidal de la Blache)―, 언어사학자와 군사학자들 또한 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7. 나아가, 우리가 역사에 등을 돌림으로써, 호브하우스(Hobhouse)와 베스터마르크(Westermarck)와 같이 과학의 초석을 다져온 이들에게도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회 진화의 원리나 발전적 경향을 발견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역사의 사실들을 활용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일부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사회 변화(social chang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역사(history)'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실험적 상황이 유럽 문명과 접촉하면서 변화하는 원시 사회에서 인류학자들이 관찰할 수 있는 무엇보다 훨씬 더 깊고 다양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8. 과거와 심지어 오늘날에도 원시 사회에 대한 기능적 에스노그라피 연구(functional ethnographic studies)를 연구 발전의 비용(expense of developmental studies)으로 과대평가하고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연구를 기반으로 삼아온 몇 가지 기본 가정의 타당성을 검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society)'라고 불릴 수 있는 실체가 존재하며, 그러한 실체는 '구조(structure)'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그리고 그 구조는 기능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제도나 사회적 관계의 집합으로 추가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이러한 가정들은 생물학적 과학에서 온 비유이며, 그것들이 유용했던 경우도 있지만 매우 위험한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에 기반하여 논의된 것은, 우리가 다섯 발가락을 가진 조상으로부터의 계통을 알 필요 없이도 말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의 구조와 제도의 작동도 그 역사를 알 필요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란,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 결코 말과 닮지 않습니다. 운 좋게도 말은 말로 남아 있고 —적어도 역사적 시간에서 그래왔으며— 코끼리나 돼지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사회는 무척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같은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전 세계의 몇몇 매우 외딴 지역을 제외하면, 이미 광범위한 변화를 겪지 않은 원시 사회는 없습니다. 새로운 사회 체계가 등장했으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변화와 관련해서 '사회', '구조', '기능'과 같은 용어들이 정의되어야 합니다.
사실, '구조'라는 용어는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고 알려진 관계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역사적 표현으로 사용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원시 사회를 연구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피해가기 위해 유기적 분석을 확장시켜, 그러한 사회들이 병리적 상태에 있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특정 유형의 사회에서 일반적이거나 공통적인 것을 의미하는 '정상(normal)'을 발견하려는 수단은 있을 수 있겠으나, 생리학적 비유의 의미에서 '정상'을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특정 유형의 사회에서 정상인 것이 그것이 발전 중인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는 비정상적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뒤르켐이 사회 병리학(social pathology)에 대해 만족스러운 정의를 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회나 제도의 역사가 그것의 기능적 연구와 무관하다는 주장에서 벗어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점에서도 되돌아볼 수 있어야 비로소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건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알고 있듯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현재보다 과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지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드 토크빌(de Tocqueville)은 프랑스 혁명 당시 참여했던 누구보다도, 사회학적으로 볼 때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훨씬 잘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단순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명료한 당대의 지성들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변화의 과정에서 관련된 제도의 본질은 역사의 시험대에 놓이기 전까지 적절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21] 교수는 비록 약간 다른 관점에서이긴 하지만 비슷한 견해를 제시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현재를 알지 못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발전만이 현재의 요소들을 각각의 관계 속에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둘 다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은 루이 뒤몽(Louis Dumont) 교수가 간결하게 요약했습니다. "역사는 사회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움직임이다(history is the movement by which a society reveals itself as what it is)".[22]
9. 마지막으로, 이 점은 간단히 언급만 하겠습니다만, 역사가 자체도 중요한 사회학적 연구 분야를 제공합니다. 즉, 히스토그라피(historiography)에 관한 사회학, 여기서 역사학자들 자신과 그들의 저서가 조사 대상이 됩니다. 과거에 역사학자들이 종교 개혁(Reformation)이나 하노버 왕위 계승(Hanoverian Succession), 또는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에 대해 썼던 내용은 지금 쓰여지는 내용과 다릅니다. 이는 단순히 해당 사건들에 대해 지금 더 많이 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치적 변화와 기타 사회적 변화로 인해 여론의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변화하는 현재의 사회적 사고의 내용 중 일부로서 역사적 지식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지식 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사회인류학의 사회학(sociology of social anthropology)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무엇을 조사하고 관찰하며 기록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관찰을 통해 도출하는 추론이 세대에서 세대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탐구하는 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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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무시(ignorance of history)로 생겨나는 몇 가지 결과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인류학 간의 연결 고리가 붕괴되면서, 우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 것은 역사학자들일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들이 실제로 많은 것을 잃고 있다고 확신하며, 덧붙여 우리가 일부 역사를 읽는 것이 적은 것이라면, 그들 중 사회인류학을 읽는 사람은 더욱 적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보다 조금 더 많은 듯하며, 그라네(Marcel Granet), 블로흐, 뒤메질(Dumézil) 같은 이름들이 즉시 떠오르는 점이 이를 보여줍니다. 이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장점들이 우리가 전통적인 역사학 분야에 진입했을 때 역사 문제들에 빛을 비출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장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장 경험(field experience)과 우리의 동료들의 현장 경험입니다. 봉건 제도를 카피톨라리(capitulary)와 연대기에서 읽는 것과 그것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2년 이상 살아보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예를 들어, 루이 9세(Louis IX)에 대해 부족한 문서를 통해 읽는 것과, 몇 달 동안 매일 그와 대화하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영국의 사회인류학자들이 역사 연구를 수행하지 않은 이유, 또는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현장 연구(field research) 강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현장 연구 자체를 위한 과도한 강조와, 단지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원시 민족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우리의 현장 노트를 작성하는 데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 자신의 기술과 언어적 자격 외에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시간이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은 아프리카에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언어—하나의 셈족(Semitic) 언어, 하나의 하미트족(Hamitic) 언어, 두 개의 닐로틱족(Nilotic) 언어, 그리고 하나의 수단족(Sudanic) 언어—를 배우고, 다른 아프리카 언어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인류-역사학 연구(anthropo-historical studies)는, 역사학의 한 분야에서 학자로 활동하게 된 인류학자들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 프레이저, 리지웨이(Ridgeway),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 같은 고전학자(classical scholars)들, 그리고 로버트슨 스미스, 쿡(Cook) 같은 셈 학자(Semitic scholars)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시대의 사회인류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자신들의 연구에 적용한 사람들입니다. 전문 인류학자가 쓴 몇 안 되는 진정한 역사적 책 중 하나가 바로 내 저서 『The Sanusi of Cyrenaica』입니다.
인류학적 훈련, 특히 현장 연구를 포함한 훈련은, 우리가 연구하는 단순 사회들과 여러 면에서 제도와 사고 방식이 유사한 이전 시대의 역사를 조사하는 데 있어 특히 가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들에 대해 역사가들은 몇 안 되는 문서들로부터 어느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인류학자들은 그가 그러한 문서들로 도출한 결론이 그들의 사고를 정말로 대표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의문은 역사가들이 고대 그리스인과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을 훨씬 더 비판적이지 못하고, 순진하며, 심지어 어린아이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경악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묘사는 훨씬 낮은 기술적 및 문화적 수준에 있는 미개인들의 사고 방식보다도 열등하게 여겨집니다.
샤를마뉴(Charlemagne) 궁정의 시인들이 무엇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만,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혹은 그들이 쓴 글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까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옥스퍼드의 학자가 어떻게 루이 경건왕(Louis the Pious)의 농노의 사고방식에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날 사회인류학 과정이, 일부 현장 연구 활동을 포함하여, 단순히 목적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수단으로 여겨져서 역사가들의 훈련에서 가치 있는 일부분으로 간주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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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역사학자가 동시에 사회학자가 될 수 있고 사회학자가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에서 이해되는 사회인류학과 사회학적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이 이해하는 역사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 차이는 목표나 방법론에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양자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아이디어 체계를 자신만의 용어로 번역하여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비슷한 수단을 사용합니다.
인류학자가 직접 사람들을 연구하고, 역사가가 문서를 통해 연구한다는 점은 기술적 차이에 불과하며, 방법론적 차이가 아닙니다. 또한, 인류학적 연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특정 사람들을 연구한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역사가들―예, 네이머(Namier)―도 몇 년 간의 기간만 다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역사가의 역사적 과거가 ―고고학과의 경계에 가까워지지 않는 한― 훨씬 더 많은 자료로 문서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단순히 사실의 양이 더 많고 그로 인해 사건과 인물이 보다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작은 사회를 연구하고 역사학자들이 큰 사회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차이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부 원시 사회와 야만 사회는 고전 및 중세 역사가들이 연구한 사회만큼 크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로 원시 사회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것이 역사학자들에 의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역시 방법론적 중요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법과 주술에 대한 책을 쓰는데, 이는 많은 원시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에서의 마법과 주술에 관한 역사도 쓰일 수 있으며, 실제로 쓰여져 왔습니다.
마법과 주술은 약간 난해한 주제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이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주류 역사학자들이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며, 심지어 사회학적 관점을 취할 때에도 주로 정치 제도에 관해 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반면, 우리는 원시 사회든 우리의 사회든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에도 똑같이 관심을 가지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로 간과되어 왔습니다.
영국에 결혼과 가족의 역사나 친족 관계에 대한 역사가 존재할까요? 더욱이 ―그리고 여기서 두 학문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적어도 현재의 학문 체계에서― 마법과 가족과 같은 주제에 관한 역사적 저술들은 우리의 전문적 훈련과 현장 경험 덕분에 익숙한 많은 문제들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는 역사가들이 더 자주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도 해당됩니다. 예컨대, 초기 법의 본질, 왕권, 복수(feud)의 제도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현실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 배우게 된 질문들, 즉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의 압박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질문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거의 제기되지 않으며, 따라서 답변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문서는 우리가 언급한 주제들에 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루는 사회들이 그러한 자료들로 풍부하기도 하고, 우리가 행동을 직접 관찰하고 질문을 통해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역사가들은 문서에서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그 문서에 질문을 던질 때에는 종종 침묵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와 사회인류학 사이에 분명한 이론적 구분을 짓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데이터를 다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에 대해 다소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영국 공적인 삶(public life)에서 또는 역사 속 특정 시점에서 왕관이 차지하는 위치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그러하듯이 군주제의 역사를 세부적으로, 아마도 수세기에 걸쳐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현재의 현재든 과거의 현재든 특정 시점에서의 상호 연관된 사회적 관계의 한 집합에 더 관심이 있으며, 그러한 관계의 전개 과정은 우리에게 제한된 중요성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사 속 어느 시점의 왕관의 위치는 다른 시점에서의 위치와 비교되었을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관련성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그 데이터가 가지는 중요성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언어학(philology)을 참조하지 않고도 언어의 몇 가지 사회학적 문제를 연구할 수 있지만, 메이에(Meillet)가 단어의 의미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원했을 때, 그는 당연히 그러한 변화가 언어의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해야 했습니다.[23]
제가 왕관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우리의 훈련 과정에서 현장 연구(fieldwork)를 중시하는 점에서 비롯된 지향점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추가적인 관찰로 이어집니다. 역사가들은, 말하자면, 역사를 '앞으로(forwards)' 써 내려가며, 우리는 역사를 '뒤로(backwards)' 써 내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의회의 역사가였던 폴라드(Pollard)는 위테나게못(Witenagemot)이나 그와 비슷한 시점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의 발전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로 가 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곳에 가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대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현재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것이 자기 자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의회―그 절차, 정당, 압력 단체, 선거구 내 조직, 그리고 의원들의 직업적, 계급적, 종교적 구성 등―을 연구한 다음, 현재에 대해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과거 발전의 여러 단계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대체로 착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역사가들은 현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사실들은 현재의 것들과 유사점을 그릴 수 없으면 무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를 이해하는 역사가만이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공감(empathy)이 아닙니다. 별로 신뢰하지 않거든요. 내가 말하려는 건, 역사가가 자신의 규범·사상·가치에 대한 경험을 통해 다른 시대 사람들의 범주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현재 문화와 모든 문화들 간에 폭넓은 겹침이 없었고, 또한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기본 심리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먼 시대 먼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가도,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류학자도 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찰을 설명할 범주조차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법·종교·경제 등의 범주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범주들은 필요에 따라 때때로 목적에 맞게 확대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에 노골적으로 집착하며 과거를 어느 정도 당연히 여긴다면, 역사가들은 과거에 몰두하면서 현재를 철저히 당연시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역설이 나타납니다. 현재는 과거가 되었을 때 회고적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또한 인류학자와 역사가가 동일한 사실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각자 다른 목적을 위해 이를 연구하고, 이를 다르게 사용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인류학자는 사회의 과거를 연구하여 자신이 현재 조사하고 있는 것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온 특징인지 확인하거나, 자신이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상관관계가 실제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인지 확실히 하거나, 어떤 사회적 운동이 반복적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과거를 탐구합니다. 이는 과거의 선례와 기원을 통해 현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24]는 통시적 언어(diachronic language)와 공시적 언어(synchronic language)의 차이(대략 문법과 음운의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 이 문제에 직면했으며, 나는 공시적과 통시적이라는 용어가 영국 인류학에 최초로 도입된 것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지 다음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현재를 현재로 해석하는 기능주의적 관점과, 현재를 과거를 통해 해석하는 역사적 관점의 해석이 어떤 식으로든 결합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우리는 아직 이 두 가지를 만족스럽게 결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영국의 오늘날 사회적 조건을 현재의 사회적 관계 집합만으로는 한계까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조건들을 다양한 역사적 변화―예를 들어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이 초래한 변화―의 결과로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인류학자가 하는 일과 역사가가 하는 일 사이의 이러한 대비는, 인류학자가 특정 시점―현재의 현재 또는 과거의 현재―에 국한된 사회를 연구할 때에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가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 발전을 연구할 때는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최근 몇 십 년 동안, 모든 또는 대부분의 사회에 진리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 명제를 도출하려는 비교 발전 연구는 더욱 적게 시도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가 실제로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 것이 정당하며, 설사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거의 가치가 없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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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판자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사회학적 역사(sociological history)와 일부 인류학자들이 사회 역학(social dynamics), 통시적 사회학(diachronic sociology), 사회 변화(social change) 연구, 과정 분석(processual analysis)이라 부르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고백하겠습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회인류학과 역사는 모두 사회 과학 또는 사회 연구의 한 갈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두 분야는 서로 관련성을 공유하고 있고, 각각이 서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원인들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1) 우월의식(snobbery)과 자연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욕구. 사람들은 언제쯤 양심적인 역사가와 양심적인 인류학자가 화학자나 생물학자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엄격하며, 비판적으로 연구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까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는 연구 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연구하는 현상의 본질에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것이 명확히 이해되지 못한 이유는, 포퍼(Popper)[25] 교수가 올바르게 지적했듯, 결정론(determinism)과 과학적 방법(scientific method)을 불행히도 동일시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방대한 양의 일반 역사 연구가 이루어진 것에 비해 사회학적 역사학자들이 적었다면, 최근 수십 년 동안 역사인류학자들은 훨씬 더 적었습니다. 또한, 사회인류학적 발전 연구(anthropological developmental studies, 진화론적 추측과 구분되는 진정한 역사적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학문 간 연구 접근 방식의 차이와 유사성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두 학문 사이의 비교를 일관되게 제시하기 쉽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이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연구를 거의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주로 우리의 연구 대상이 역사적 기록이 없거나 기록이 매우 부족한 민족들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지적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 적어도 특정 종류의 역사와 특정 종류의 사회인류학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러한 구분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3) 현재 문제와 주제와 관련된 관심사의 차이뿐만 아니라 연구 영역의 거의 완전한 분리가 존재합니다. 유럽의 역사가들 대부분은 특정 유럽 민족의 과거에 대한 방대한 양의 사실을 축적하는 데 평생을 바칩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자료가 자신들이 수행하는 연구와 지리적으로나 대부분의 주제 면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베케트(Becket) 논쟁, 용담공(Charles the Bold),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 베니스의 성장, 또는 쿨투르캄프(Kulturkampf)에 대해 읽는 것이 자신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17세기 프랑스나 18세기 영국의 역사가가 훗텐토트(Hottentots)이나 마사이(Masai)에 대한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바뀔 수 있으며,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중 일부를 아래에 열거하겠습니다.
(1) 최근 몇 년 동안,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연구한 단순 사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왔습니다. 이는 역사를 사회적 변화를 일으킨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든, 이러한 사건들이 오늘날의 사고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든, 혹은 이 두 관점을 모두 포함하든 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 관심의 증가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기에, 그 예로 두 명의 저자만을 언급하겠습니다. 바로, 반즈(Barnes)[26] 교수와 커니슨(Cunnison)[27] 박사입니다.
(2) 인류학자들은 이전보다 단순하고 발전되지 않은 사회와 문화에 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신 근동(Near East)과 극동(Far East)과 같은 보다 복잡한 사회와 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역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도 사회인류학과 인도학(Indology)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는 뒤몽[28] 교수의 주장은 매우 타당합니다.
(3) 비교 방법(comparative method)을 사용한 법칙 추구는, 발전 연구에서 불가피하게 일정한 발전 단계를 공식화(formulation of invariable stages of development)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역사적 접근법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실천적으로, 이러한 비교적 법칙 추구가 폐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의 창립자들이 가졌던 역사적 관심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30년 전이었다면 그러한 복귀가 초래했을 난처함 없이 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비교 방법도, 신중하게 그리고 규모와 공식화의 범위를 좁게 설정하여 사용한다면,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4) 이전에 언급했듯이, 인류학자들은 역사에 기여할 수 있으며, 앞으로 일부 인류학자들은 더 전통적인 역사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5) 역사가들이 점점 더 그들의 관심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활동을 유럽 역사로 제한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용담공과 공의회 운동에 대한 지식을 추가하는 대신 더 많은 주도성을 가지고 비유럽 사람들과 문화의 역사를 집필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수행한 연구가 자신들의 연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역사가들에 대해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의견에 대해 반론이 있을 것을 대비해 질문하겠습니다. 영국에서 인도의 일부 또는 전체 역사를 쓸 수 있는 학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여기서 나는 영국의 인도 지배 역사가 아니라, 실제 인도 자체의 역사를 말합니다.) 중국의 역사―단순히 의화단 전쟁(Boxer Wars)만이 아니라―를 쓰거나,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의 역사 또는 아프리카 대륙이나 그 일부 민족의 역사를 쓸 수 있는 학자가 몇이나 될까요? (여기서도 나는 영국의 정복과 행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아마 수를 세어 보면 두 손의 손가락으로 충분할 것이고, 대다수의 손가락이 절단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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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틀랜드(Maitland)[29]는 "인류학은 역사가 되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설명한 의미에서 ―그리고 제가 믿기로 그가 이 글을 쓴 맥락에서도― 저는 이 격언을 받아들입니다. 단, 이것이 반대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입니다. 즉, "역사는 사회인류학이 되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메이틀랜드도 이 조건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일한 에세이 "The Body Politic"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콩트(Comte)가 사회적 현상의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e)에 대해 가르쳤던 교훈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언급했습니다. "내게는 그 교훈을 배운 사람들이 사회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로 보입니다."[30]
따라서, 저는 레비-스트로스 교수의 관점[31]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특히 역사와 사회인류학의 각 영역을 구분하는 점에서— 그 결론에는 동의합니다. 즉, 두 학문의 차이는 지향점(orientation)의 차이일 뿐, 목표의 차이가 아니며, 두 학문은 "불가분(indissociables)"하다는 것입니다.
노트
[1] Evans-Pritchard, E. E., "Social Anthropology: Past and Present", Man, 1950, No. 198.
[2] Durkheim, E., L'Année Sociologique, vol. 1, 1898, "Préface"; vol. 2, 1899, "Préface".
[3] Kroeber, A. L., "History and Science in Anthropology", American Anthropologist, 1935, p. 658.
[4] Kluckhohn, C., "Some Reflections on the Method and Theory of the Kulturkreislehre", American Anthropologist, 1936, pp. 166-7.
[5] Spoehr, A., "Observations on the Study of Kinship", American Anthropologist, 1950, p. 11.
[6] Aron, R., 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 1948, p. 285.
[7] Marrou, H-I.,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1954, p. 161.
[8] Cassirer, E., An Essay on Man, 1944, p. 195.
[9] Langlois, Ch. V. and Seignobos, Ch., Introduction aux Études Historiques, 1898, passim.
[10] Roscoe, J., The Baganda, 1911.
[11] Boas, F., "History and Science in Anthropology: a Reply", American Anthropologist, 1936, p. 137.
[12] Sapir, E., Time Perspective in Aboriginal American Culture, a Study in Method, 1916, passim.
[13] Cassirer, E., ibid., p. 178.
[14] Collingwood, R. G., An Autobiography, 1939, p.114.
[15] Codrington, R.H., The Melanesians, 1891, p. 47.
[16] Southall, A. W., Alur Society, 1953, p. 5.
[17] Malinowski, B., Myth in Primitive Psychology, 1926, passim.
[18] Calonne-Beaufaict, A. de, Azande, 1921, pp. 8-9.
[19] Laguna, F. de, The Story of a Tlingit Community, 1960, pp. 16 seq.
[20] Malinowski, B., ibid., passim.
[21] Levi-Strauss, C., Anthropologie Structurale, 1958, p. 17.
[22] Dumont, L., "For a Sociology of India", Contributions to Indian Sociology, no. l, 1957, p. 21.
[23] Meillet, A., "Comment les Mots changent de Sens", L'Année Sociologique, vol. IX, 1906.
[24] Saussure, F. de,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49, pp. 127 seq.
[25] Popper, K. 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2, 1945, p. 306.
[26] Barnes, J. A., "History in a Changing Society", Rhodes-Livingstone Journal, no. 11, 1951.
[27] Cunnison, I., "History on the Luapula", Rhodes-Livingstone Papers, no. 21, 1951.
[28] Dumont, L., ibid., p. 7.
[29] Maitland, F. W., Selected Essays, 1936, p. 249.
[30] Maitland, F. W., ibid., p. 247.
[31] Levi-Strauss, C., ibid., p. 31.
번역 송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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