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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 Kroeber, 1935, "History and Science in Anthropology", American Anthropologist, 37-4: 539~569, (https://doi.org/10.1525/aa.1935.37.4.02a00020).

 

 

HISTORY AND SCIENCE IN ANTHROPOLOGY 

A. L. KROEBER 

 

 

최근 오네(Hoernlé) 여사[1]의 연설은 인류학에서의 법칙과 역사와 관련된 오래된 질문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지만, 최근 인류학적 사고의 특정한 흐름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 기반한다고 본다. 특히, 연설에서 보아스(Boas)를 향한 태도는 그러한 오해를 더 명백히 보여주며, 이러한 오해가 사실이라면 이는 현대 인류학에서 보아스의 걸출한 위치 때문에 중요하게 봐야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보아스는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 중인 민족학자들과 사회인류학자들을 양성했으며, 미국에서는 이들 모두에게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그의 방법론에 관한 질문은 단지 개인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인 요소도 필연적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사실, 오네 여사가 보아스의 입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이러한 개인적 요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후의 논평이 개인적인 측면을 띠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 이는 완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제3자의 입장에서 그를 대신해 대변하거나 해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 이는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보아스는
인류학의 주요 공적인 인물로서 그의 개인적인 태조차도 공적인 관심사가 되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둘째,
나는 그로부터 훈련과 영향을 받았다.
셋째, 나의 방법론적 관점은 그의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그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동시에 이에 대해 답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발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

 

1

 

우선, 보아스의 교육적 배경이 물리학이라는 실험 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이는 그를 심리물리학(psychophysics)과 물리지리학(physical geography) 연구로 이끌었으며, 그의 박사 논문은 '바닷물의 색깔(color of sea water)'에 대한 것이었다.[2] 이러한 연구는 그를 1인 탐험자로서 2년에 걸친 배핀랜드(Baffinland) 지리 탐험으로 이끌었으며, 탐험 중 현지 원주민들과의 깊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888년에 발표된 "Central Eskimo" 연구와 함께 인류학자로서 경력이 시작되었다.

보아스는 물리학을 통해 인류학에 문제 정의의 명확성, 방법론의 엄격성, 그리고 비판적 객관성을 도입했다고 본다. 이러한 자질은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으며, 이를 인류학에 전수한 것은 보아스가 이 학문에 기여한 가장 근본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헌과 비교해 보면, 사회학적 법칙이나 역사적 재구성의 유효성 정도에 관한 그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단지 부차적 문제라고 본다.

 

정확하고 고도로 발전된 실험 과학이라는 배경에서 나온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아는 한, 사회인류학 지도자들 가운데 이러한 배경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이는 분명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배경은 연구 목표와 방법론에 특정한 제약이나 색깔(coloring)을 가져온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약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오네 여사와 다른 사람들이 보아스를 오해하게 된 원인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보아스가 민족지학(ethnology), 언어학(linguistics), 체질 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분야에서 동시에 작업을 수행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단순한 공헌을 넘어, 분야마다 방대한 근간이 되는 연구를 이뤄냈다. 이 사실은 그의 한 가지 분야, 예를 들어 사회인류학(social anthropology) 내에서 그의 입지를 이해하는 시도에서 간과할 없는 방법론과 관심사의 폭넓음을 전제하고 있다. 보아스가 일반적으로 인정된 인류학의 부문 중에서 유일하게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고고학(archaeology)이다. 그는 타인의 검증된 고고학적 연구 결과조차 자신의 해석에 있어 진지하게 활용하지 않았다.

고고학과 민족지학 모두 문화적 자료를 다루는 반면, 체질 인류학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고학에 대한 무관심이 신체적 인류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점은 이상한 불일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이 본질적으로 '과학적(scientific)'이며, '역사적(historical)'인 방식은 극히 드물고 망설여진 채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완전하게 일관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것이 보아스가 항상 문화적 현상의 역사성을 강조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학파가 종종 '역사적 현실주의(historical realism)'로 불려왔다는 면면과는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역동적(dynamic)'이라는 별칭도 적용된 바 있는데, 이는 어느 쪽도 완전히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사실, 특정하고 선택적인 프로그램을 따르는 명확히 구별 가능한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보아스 학파(Boas school)'라고 불릴 만한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더 나아가, 영국, 프랑스, 독일과 비교해봐도 미국 인류학에 어떠한 '학파'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국가적 차이는 본질적으로 보아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전파론적, 기능론적, 문화영역적 방법들 중 어느 하나도 우월한 '왕도(king's highway)'로 지정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이러한 반대는 실험 과학이나 실험실 과학(laboratory science)의 관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과학들에서는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이나 분광 물리학(spectroscopic physics) 같은 연구 분야와 기술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학파 간 방법론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리 과학(physical science)에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존재한다.

그에 반해, 인류학에서 각 학파들이 각자의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것은 미성숙하거나 편협하며 불완전하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학파들 간의 차이는 정당하게 목표의 차이에 기인하며, 결국 그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바에서 기초적인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학파들은 너무나 자주 자신들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결과를 선전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신들의 방법론을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옹호하려고 나아갔다고 본다.

 

이런 편향된 움직임들과 경쟁하면서, 보아스는 학파의 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가 역사적 재구성 해석의 편향성을 경고하면,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역동적' 방식의 '기능주의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가 사회학적이나 심리학적 법칙에 회의적이고, 문화적 현상의 역사적 복잡성을 강조할 때는 즉시 '역사적'으로 불린다. 그러나 오네 여사는 적어도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아스가 처음에는 '역사적 방법(historical method)'을 옹호하다가 나중에 '수용' 또는 '인정'하거나 아니면 역동적 기능주의적 프로그램과 방법론으로 후퇴했다고 묘사해 보아스의 실제 입장을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이해에 따르면, 보아스는 이러한 두 가지 라벨―역사적 현실주의자와 역동적 기능주의자―을 항상 망설이며 사용했다. 이는 보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물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사실, '역사적 현실주의(historical realistic)''역동적(dynamic)'이라는 두 용어는 보아스 자신이 만든 슬로건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네 여사의 설명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설명는 다음과 같다. 보아스는 '역사적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한 의미 안에서만 그렇다. 되레 그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이나 말리노브스키가 한 줄의 글도 쓰기 전에 구조적 상호관계, 변화, 과정에 초점을 둔 기능주의자(functionalist)였다.

 

과정(process), 즉 철저히 규정된 하나의 과정 자체가 보아스 작업에서의 유일한 지속적인 목표이고, 보아스로부터 명확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작업에서의 유일한 공통 요소이다. 이는 결국 물리 과학에서 가져온 객관적 목표, 따라서 방법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물리 과학의 실험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무기질적 세계와 비교할 때, 문화라는 영역에서 이러한 방법론의 한계와 어려움은 많고 명백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 점을 결코 스스로 속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보아스가 등장했을 당시, 인류학은 도식적 해석(schematic interpretations)―모건(Morgan)이 대표적인 예―몰두하고 있었다. 보아스는 주저하지 않고, 객관적인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 즉 자연의 세계 안에 있는 실제 맥락에서 잘려 나와 주관적으로 선택된 증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때에만, 유효해 보인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보아스가 이러한 맥락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때, 아마도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는 역사적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판적 안전장치(critical safeguard)로서 역사적 방법을 적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가 다루었던 문제들은 역사적이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과정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적 방법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려면, 결국 역사를 하려고 해야만 한다. 모건처럼 특정 도식(specific schemes)에 관해서는,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들, 그리고 심지어 반쯤만 신뢰할 수 있는 역사학자들조차 이 체계를 철저히 불신해왔다. 이는 물리학자들이 자기 분야에서 그러하듯 그러했다. 사실, 모든 도식적 설명(schematic explanations)은 본질적으로 해당 학문이 미성숙하다는 징후일 뿐으로 보인다.

 

[ … ]

 

8

 

이 논의가 하나의 인물에 크게 집중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이 인물은 단지 인류학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적용을 이 학문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보아스 학파는 아마도 오늘날 인류학에서 가장 많은 수의 활동적이고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연구자들로 구성된 집단일 것이다. 만약 이 학파의 직접적인 구성원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 아래 있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이것이 최대의 학파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이러한 영향력을 요약하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특히 눈에 띈다.
첫째, 이 학파는 과거에는 단순히
역사적인 방식으로만 또는 순진한 방법으로 다루어진 자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과학의 방법으로 인정받는 방식을 적용하려 했다.
둘째, 이 학파는 이러한 자료들이 실험 과학에서 발전된 방법을 직접적으로 전이 또는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독특(sufficiently distinctive)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법칙을 찾거나 사회학적 대체물을 추구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셋째, 이 학파는 기존의 믿을 만한
역사적 방법을 활용했으며, 이를 일관되게 실천했고, 이 점에서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넷째, 아마도 과학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이 학파는 역사적 목표의 근본적인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일반적으로 점차
역사적 문제를 공식화하는 데 실패했다. 실제로 역사로부터 본질적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부정적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이 학파의 결과물은 대체로
비역사적이며, 학파의 태도 자체가 반역사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점은 이 학파의 과학적 기원과 완전히 일치하며,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현재 상황은 있는 그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나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역사적(historical)'이라는 용어로 내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한번 반복하고자 한다. 이는 시간적 순서에 심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심취(preoccupation)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본적이고 통합적인 지적 태도를 의미한다.

 

9 

 

인류학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역사적 결과를 모두 솔직히 부정하는 측면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대개 사회학적(sociologic) 또는 기능주의적(functional)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본질상, 비록 법칙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문화 분야에서 상수(constants)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먼저 말하자면, 이는 그 자체로 누구도 반대하지 않거나 반대할 수 없는 목표이다. 유일한 질문은, 얼마나 결과가 생산적으로 얻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이런 움직임의 한 측면에서 가장 활발하고 영향력 있는 대변자는 사회학 연보(L'Année Sociologique) 그룹과 래드클리프-브라운이며, 다른 측면에서는 말리노브스키이다.

 

뒤르켐과 모스는 소위 원시 문화를 전문으로 연구한 공인된 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의 방법은 '비교(comparative)'적 방법이며, 그들의 연구 결과는 일반 개념화(general conceptualizations)에 해당한다. 그들은 대체로 역사에서 요구되는 안전장치를 준수하며, 맥락에서 잘려진 문화의 작은 조각들을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구 결과는 더 큰 문화적 전체로 통합되는, 다시 말해 역사적인 통합이 아니라, 개념적 상수에 기반한 통합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비역사적(unhistorical)이다.

이러한 상수(constants)는 무엇인가? 뒤르켐(Durkheim)은 ―내가 그를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문화를 자신의 존재 이유(raison d'etre)이자 결속력(cohesive force)이며 생명줄(life blood)로 인식하는 '사회 집단(social group)'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집단은 이 통합적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거나 형성하려 한다. 강조점은 사회적 형태(social forms) 자체보다는 사회적 형태를 결속시키는 이 원칙 혹은 흐릿한 인식 또는 상징적 표현에 더 가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신비주의(mysticism)의 기운을 풍길 수 있다. 그러한 신비주의는 아마도 궁극적 개념들을 공식화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에서 대부분 비롯된 것일 것이다. 이 개념은 가설적 설명으로서 완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특정 증거와 만족스럽게 연결하기는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뒤르켐은 적어도 항상 사회학과 인류학을 분리시켜 왔던 간극을 가로지르는 어떤 형태의 다리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14] 그는 주로 '사회 집단(social group)''사회적 기계(social machinery)'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또 다른 요소, 즉 문화(culture)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그의 관점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이 문화는 사회의 일종의 '영구 운동의 원천(premium mobile)'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폐기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아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인 개념은 아니다. 이는 철학적(philosophical) 성격에 가깝고, 아마도 역사철학(geschichtsphilosophie)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정도에 따라 과학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며 현상의 표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검증은 어려움을 수반한다. 현재로서 뒤르켐은 더 큰 비전을 엿본 예언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모스(Mauss)는 다시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내려오며, 그의 작업에서 '비교적 방법(comparative method)'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전 세대와 달리 맥락에 대한 역사적 요구사항이 준수되었고, 발견된 상수는 특정한 하나의 요소라기보다는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즉, 기존에 순진했던 해석, 'A는 보통 B를 생산하고, B는 C를 생산한다'는 식의 유형이 이제는 'A, B, C가 더 큰 통합적으로 기능하는 전체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작동한다'는 결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특히 특정 해석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이들에게 이 점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태도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에 얼마나 실용성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철학적 친자 관계―더 정확히는 철학적 조상 관계―는 여전히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철학적 성향의 표현은 이 그룹이 현장 연구(field studies)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는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확실히 과학적이거나, 역사를 중시하는 원시사회 연구자들이 지난 세대 이상 동안 거의 만장일치로 느낀 실제적인 필요성이었다.

 

모스의 범주는 인류학의 두 주요 흐름의 절차와도 잘 맞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선물(gifts)'이나 '희생(sacrifice)'과 같은 개념으로 현상을 분류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들은 연구 중인 문화적 데이터에서 구체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비과학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도 자신의 데이터를 '길다(long)', '평평하다(flat)', '둥글다(round)' 같은 범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들이 일상생활에서는 유용하고 현실적일지라도, 과학적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다.

역사적 접근은, 사실, 이러한 수준의 개념을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다. 역사가 일반적으로 기술적 표현이나 상징적 용어를 필요로 하지 않거나, 적어도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특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처리(historical treatment)는 불완전하거나 느슨한 절차를 따른다고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처리는 자신의 자료를 시간적, 공간적, 혹은 현상적 내용 관계에 따라 조직화하며, 비역사적 경험에서 파생된 개념을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민족학자(descriptive ethnologist)는 새로운 데이터를 '전쟁(warfare)', '종교(religion)', '도구(utensils)' 같은 항목 아래에 배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외부적이고 관습적인 편의를 위해 이루어진 분류일 뿐이며, 본질적이거나 의미 있는 조직화(significant organization)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10 

 

래드클리프-브라운(Radcliffe-Brown)은 아마도 프랑스 [사회학 연보] 학파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지 않나 싶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사회학이라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인정한다. 그는 역사가 적절하지 않다거나 거부하지는 않지만, 사회학은 역사와는 다른 분야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두 분야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필요한 역사적 고려 없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사회문화적 영역에 법칙이 존재하며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법칙은 단순히 문화적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유사한 패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 특정 방식으로 발생하도록 만들고, 반드시 그렇게 발생하게 하는 요소들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문화의 여러 부분은 서로를 참고하여 최대한 통합적인 전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를 조정하고 재정비하는 과정을 거친다.

프랑스 사회학자들과 래드클리프-브라운을 비교해보면, 현장 조사(field work)에 대한 강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가 난다. 그는 자료를 신선하게 분석할 수 있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경험주의자로서, 추론이나 철학보다는 과학에서 근거를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리버스(Rivers)로부터 심리학 훈련을 받았다.

 

사회인류학과 역사를 분리하는 것을 반드시 비난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주장하는 전반적인 입장은, 문화적 자료를 다루는 모든 학문에서 확실히 역사적 접근이 정당화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비역사적인 접근 방식이 새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 하에 역사적 접근을 생략하는 것도 분명히 정당하다. 궁극적으로, 판단의 기준은 결과에 있어야 한다.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평가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일반화가 광범위하지만 동시에 미약하며, 구체적으로 적용 가능한 경우에는 보편성을 잃고 더 이상 법칙이나 상수(laws or constants)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평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는 사회학자들이 종종 겪는 오래된 딜레마일 것이다. 누구도 예외를 들 수 없는 공식을 발견할 때쯤이면, 그 공식이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현상과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도 그것을 정확히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의 유일한 가치는 그 자체로 종결목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주장은 모든 사회나 문화가 통합적으로 기능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주의해야 할 시각이지만, 충분히 타당하며 왜곡된 인식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추가적인 탐구를 위한 도구나 최종 종합(final synthesis)으로서 과학적 또는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의의는 스스로에게 있으며, 이러한 유형의 공식화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모든 생리학자는 모든 유기체의 작용에는 강력한 통합적 경향(strong  integrative tendencies)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생리학자가 그러한 원칙(principle)을 과학의 최종 결과물로 간주하거나 과학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도구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는 이를 배경적인 가정으로 여길 것이다. 이는 학문의 균형을 위협하는 지나치게 분석적인 해석이 나타날 때 호출될 것이다. 우리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의 법칙이나 기본 가설(law or basic hypothesis)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지나치게 분석적인 보아스 학파의 경향에 대한 반응 또는 교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네 여사가 반투(Bantu)의 법과 결혼 제도에서 문화적 법칙(cultural laws)의 예로 언급한 사례들은, 당연히 법칙이 아니라 단지 독특하게 발생한 현상들을 기술적으로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훌륭한 역사의 일부이지만, 시간적 요소와 참조 없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를 역사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잠재적으로 과학적 해석을 위한 원자료(raw materials)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이나 프로파간다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의 구체적인 태도는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 인류학자들―전파론이나 문화영역 지지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입장은 역사적 통제 방법(historical control methods)을 명시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면, 보아스(Boas)의 관점과 매우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 같은 이단자(heretic like myself)조차도 모든 인류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역사적 재구성(historical reconstruction)을 하도록 요구하겠다는 건 아니다. 내가 단지 주장하고자 하는 건, 문화적 현상을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역사적 방식으로 다루고자, 우리에게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작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머리에 노란 모자를 씌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11 

 

말리노브스키(Malinowski) 또한 기능주의자이지만, 그의 최종 해석은 래드클리프-브라운보다 심리학적인 성향을 더 많이 띠고 있다. 그는 전문적으로 법칙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현장 데이터의 발표와 해석은 자극적이고 중요하며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의 데이터는 거의 전적으로 하나의 제한된 지역에서 나왔으며, 주로 하나의 작은 문화에서 압도적으로 추출되었다. 나머지 결론은 본질적으로 예리한 사고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의 일반화는 겉보기에 나타나는 타당성이 부족할 수 있다. 결국, 트로브리안드(Trobriand) 문화로 문화적 또는 심리적 보편성을 추론할 이유는 우리 자신의 문화로부터 추론할 이유보다 많지 않다. 이것은 이제 인류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이다.

물론 말리노브스키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보편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논점은 비전문가, 특히 신중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 결과가 보편적이거나 보편성에 가까운 듯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방식으로 주로 발전되곤 한다. 말리노프스키의 결론이 제시력 있고 일반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타당한 이유는 그의 방법론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뛰어난 상상력과 지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방법론 자체가 보편적으로 전이될 만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만큼 제한적이다.

우리는 이제 트로브리안드 지역이 속한 작은 문화권에 대해, 특정 범위에서는 멜라네시아 전체에 이르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이로 인해 트로브리안드의 많은 특징적인 제도와 태도가 그 지역에서 널리 퍼진 제도와 태도를 재작업하거나 특수화했거나 왜곡한 결과물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단순히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문화를 넘어 일반화를 시도할 때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어, '쿨라 포틀래치(Kula potlatch)'나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 문제의 경우, 멜라네시아 전역―적어도 마심(Massim) 지역―에서 제도화된 증여(giving)나 거래(trading), 근친 관계(near kin)에 대한 데이터는 일관성 있는 일반화가 시도될 때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물론, 나는 멜라네시아 문화의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다른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필수조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간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도 여러 문제는 성공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한 순간에 기반한 연구라도, 명확히 상호 연관된 제한된 지역 내부에서 비교 연구를 통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조차도 어느 정도 역사적인 접근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실제로, 래드클리프-브라운처럼 명확한 기능주의자도 "오스트레일리아 부족의 사회 조직(Social Organization of the Australian Tribes)"에서 이 접근을 기반에 두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그 이유로 인해 이 연구를 그의 가장 가치 있는 단일 연구로 간주한다. 하지만 말리노프스키는 지금까지 유사한 기초적인 역사적 고려조차도 하지 않고, 자신의 눈부신 궤도로 나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그가 훌륭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지성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12 

 

나는 부득이하게, 영혼을 구하기 위해 주어진 20분의 시간―심지어 묵독의 시간조차도―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쉽지만 몇몇 중요한 학자들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최근에 그의 방법론을 자세하게 논의한 바 있는 위슬러(Wissler), 그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 철저한 분석 없이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던 나의 동료 로위(Lowie), 비판 없이 받아들여질 만큼 역사적 재구성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발명과 관련된 환경적 요인에 대한 실증적 조사를 더한 노르덴스키올드(Nordenskiold), 그리고 필연적으로 역사적 접근을 주로 따라야 하는 키더(Kidder)와 다른 고고학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지만 역사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둔 이 에세이에서, 동시대 학자들만 다루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지면을 아끼기 위해, 독일과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함께 묶여 언급되는 두 쌍의 인물, 바스티안과 라첼, 그리고 타일러와 프레이저에 한정하도록 하겠다.

 

바스티안(Bastian)은 오직 그의 이름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의 진정한 공헌은 데이터와 자료를 더 늦기 전에 수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설파한 데 있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그는 ―신비주의자는 아닐지라도― 매우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일종의 준-철학적(quasi-philosophical)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방법론이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눈에 띌 만큼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지리학자인 라첼(Ratzel)은 우리의 학문 분야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기에는 기이한 인물이다. 19세기 인류학이 형태가 없는(amorphous)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가 그러한 명성을 얻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류학적 영향은 주로 환경결정론(environmentalism) 때문이 아니었다. 영어판에서 과도하게 강조된 그의 환경결정론적 '소소한 잘못들'은 실제로 크게 문제 될 만한 것이 아니며, 실제로 인류학 내에서 환경결정론적 운동(environmental movement)을 시작한 적이 없다. 그의 영향은 오히려 명백히 역사적이었다. 그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문서들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역사적 문제를 포착하고 이를 강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peripherality)의 현상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독일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더 크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원시 사람들의 속성을 다룬 논의들이 지리적 고려사항과 우연적으로 겹쳤으며, 특정하지 않고 다소 모호하게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지칭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선배 세대 중 한 사람인 프레이저(Sir James Frazer)는 인간 마음의 통일성을 하나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원리로 간주했던 시대, 그리고 잔존물(survival)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세대에 속한다. 우리가 방법론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 ―아마 지나치게 의식적이라고 독자가 결론 내릴 수도 있는― 이 시대에, 과거 조상들의 유연하고 세련되며 태평했던 태도는 때로는 얽매이지 않은 순수함의 황금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레이저는 잊혀진 책들의 이국적 이야기들 그 자체가 목적이라며 추구했다. 과학적 문제 의식이나 시간적 관점이 그를 괴롭혔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깊이 관통한 고전적 전통에서 자라난 그는 최고의 골동품 애호가(antiquarian)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교육받은 대중들에게 미친 인상은 그의 영향이 최근 인류학자들에게는 상당히 미미한 영향을 준 것만큼, 한동안 넓고 깊었다.

그의 저작들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도출된 암시들로 인해 그는 공식적인 종교 교리를 많이 약화시켰을 것이다. 전문적으로 볼 때, 그는 주로 문화적 병리학(cultural pathology)에 대한 관심으로 대표되는 것 같다. 그의 관심은 근친상간과 그 규제(incest and its regulation), 희생(sacrifice)과 식인(cannibalism), 권력을 추구하려는 마술(magic)의 의도, 금기(taboo)라는 안전장치, 즉 무력한 문화들이 보여주는 모든 신경증적(neurotic) 증상들을 다룬 관습과 믿음들에 쏠려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독자들 사이에서 에로티카(erotica), 병리학(pathological), 신비학(mystica)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이유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젊은 남성과 여성들은, 더 교양은 없을지언정 더 강인한 사람들로서, 이러한 매력적인 주제를 남겨 두고 더 어려운 문제들이나 정신의학적 공식들을 물고 늘어진다.

그럼에도 프레이저는 어떤 형식적인 방법론이 없었음에도, 그의 현상들―문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에서 어떤 일정한 중요성을 느꼈다. 프로이트(Freud)는 그것을 빠르게 이해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나치기만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말리노프스키, 포춘(Fortune), 미드(Mead) 다른 학자들에 의해 프레이저의 관심사에 다시 접근하려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물론, 보다 현대적인 심리학적 및 문화적 방법론을 통해서였다.

 

타일러(Tylor)는 종종 프레이저와 함께 언급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내면적 유사성보다는 그들이 당대에 공통적으로 공유했던 특정 가정과 평가로 연결된다. 두 사람 모두 인류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결집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속한다. 타일러는 문제의식이 프레이저에서 결여된 만큼 강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는 과학자였다. 그는 증거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독립적으로 보이는 '연관(adhesions)'의 빈도를 다루어 이를 입증하려는 그의 유명한 시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당시에도 일부 사람들이 인정했듯, 그의 민족적 단위들이 문화적으로 독립적이라는 점을 검토하지 않아 실패했다. 또한 그의 상수들, 예를 들어 '회피(avoidance)' 같은 것들은 대체로 대략적인 수준에서 상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도는 진정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이 시도가 오랫동안 다른 이들에 의해 반복되지 않았다는 점은 타일러가 자신의 시대를 앞섰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법칙을 찾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 연결(historical connections)의 중요성을 이해했으며, 공간적·시간적 연속성이 단절된 경우 이러한 연결을 확립하려는 방법을 모색했다.

 

타일러가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수용했다는 점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전히 이를 수용하되, 다만 더 명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그러지 않는 이 가정으로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추론을 도출했는데, 이는 그가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비롯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전성기 이후 두 세대 동안, 심리학자들처럼 우리도 이 정신적 재료의 가소성(plasticity)과 그것이 받는 엄청난 조건화(conditioning)를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인간 정신을 정의하거나, 우리가 더 잘 정의할 수 있는 현상을 그것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줄이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더 비판적인 방법론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현대적인 방법론이 우선 측정 가능하거나 특성화 가능한 현상적 요소 A, B, C를 다루고, 정신의 어려운 변수 X를 뒷자리에 두는 방식을 요구한다고 해서 X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X, 혹은 그것과 문화라는 Y와의 관계는 여전히 궁극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기도 하고, 아마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학생들과 후계자들을 과학적으로 건전한 방법론만을 사용하는 초-행동주의적(ultra-behavioristic) 태도로 교육하고 있다. 이는 방법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공하면서 발생한다. 물론, 이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를 재도입하자는 요청도 아니며, 현대 방법론의 기반이 된 관점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다만, 이것이 궁극적 성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경고할 뿐이다. 인간 정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구조와 구성(structure and constitution)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는 그 정신의 현상적 산물에 개입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와 구성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 학문의 진보의 표시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본 과업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정신을 생략하면서, 비록 접근이 심리학적이더라도, 특정 결과를 더 구체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당분간 의도적으로 생략을 하고 있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변수 X가 0이라는 것을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타일러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많은 구체적인 연구 결과들이 유효하지 않게 될 수는 있어도, 그는 높은 수준의 진정한 과학적 호기심, 균형 잡힌 사고, 대체적인 접근법 간의 원숙한 태도를 가졌다. 그는 보아스(Boas)의 선구자들 중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

 

13 

 

앞선 논의의 근본적 관점은, 역사적 태도와 접근 방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과학적 태도와 접근 방식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각각 고유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한 성과와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 가지 방식을 배운 이유는 당대의 흐름이 다른 방식으로 흘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물론 이 시각에는 편향(bias)이 있을 수 있다. 나의 교육은 실험 과학과 약간 접촉이 있었는데, 나는 이를 매우 자극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나의 교육은 주로 언어학적-문학적-역사적 분야의 일반화된 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내가 인류학을 전문 직업으로 삼기까지 비교적 미분화된 채로 남아 있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요인에 대해 언급한 후, 이 진술을 하는 것이 공정해 보인다.

 

역사란, 물론, 현재 맥락에서 단순히 직업적 역사학(history de metier)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태도, 즉 정신적 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간 요소(time factor)는 역사의 본질에서 영원히 제외될 수 없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간 순서(sequence)에 대한 집착은 역사의 근본적 특성을 이루지 않는다. 연대기적 기원(annalistic origins)에서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지어 헤로도토스(Herodotus)조차 그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그리고 그가 단지 '최초의'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에스노그라퍼라는 사실은 진정으로 중요하다.

근대에 와서 부르크하르트(Burckhardt)는 진정한 위대한 역사가였다. 저서 '르네상스(Renaissance)'에서 시간적 순서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태도에서는, 그가 스스로 설정한 문제나 과업, 그가 사용한 방법에서도 모두 훌륭한 인류학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나는 분명히 인류학을 부르크하르트 유형의 작업에만 국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유형, 혹은 어느 건전한 역사적 유형의 시도, 이를 포함해 재구성 작업―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는 통합적 재구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이 인류학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과학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몇몇 작업들이, 실상은 인식되지 않고 있을 뿐 역사적 성격에서 주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왔다.

 

두 가지 접근법은 반드시 갈등을 빚을 필요가 없다(The two approaches need not conflict).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접근법은 상호 보완(supplement each other)되어야 한다. 과학적 요소는 인류학을 기존의 역사학이 가진 몇 가지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역사학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으려는 과정(process) 자체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수많은 과정의 증거를 방대한 현상 속에서 끌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매우 긍정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학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분리해낸 과정들은 실험 과학에서처럼 더 큰 과정 체계에 상당한 수준으로 통합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문화적, 역사적 자료를 전적으로 과정으로만 분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밝히는 데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현상 자체에 집중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순히 현상들을 기록하거나 나열하는 것 외에 하는 것은 그것들의 패턴(patterns)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턴은 과정이 아니다(But a pattern is not a process). 패턴은 현상의 현실(또는 현실로 믿어지는 것)에 기반을 둔 별자리(constellation)의 기술적 표상(descriptive representation)일 뿐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과학적이라기보다 역사적인 구성이다. 설사 그 기술이 정확하거나 정량적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만약 우리가 그 안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과정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패턴은 항상 독특한 역사적 현상으로 남는다. 패턴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 요소, 사건보다 더 크고 관계적일 뿐이다.

패턴들이 상호작용할 때, 우리는 다시 변동적인 강도로 작동하는 친숙한 과정들을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이해에서 가장 정의 가능한 것은 그 결과물, 즉 새로운 패턴들이다. 건전한 역사학, 그리고 상당 부분에서 건전한 인류학은 현상적 수준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실제 관계에서 연결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역사가가 '원인(causes)'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 그는 신뢰를 얻지 못하며, 대개 다른 역사학자들에게 불신을 받는다.

 

기본적으로 기능적 접근법은 역사적 접근법과 상당히 가깝다. 비판적으로 지혜롭게 사용된다면, 기능적 접근법은 원인을 명시하거나 과정을 독특하게 분리하지 않는다. 이는 대체로 패턴과 그 상호작용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다만, 이것들이 단순히 정적(static)이 아닌, '역동적(dynamic)' 또는 '기능적(functional)'으로 보이는 살아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해부학적 수준뿐만 아니라 생리학적 수준에서도 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들이 하는 일이다. 다만, 역사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데이터를 사용하는데, 이에 따라 자신들이 이미 데이터들을 기능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당연시 여긴다. 반면, 우리는 현재 알려진 원시사회(primitives)를 통해 기능주의를 발견해야 했고, 여전히 이를 약간 의기양양하게 여기고 있다.

기능적 프로그램이 나아가 법칙이나 계산 가능한 과정을 발견하려고 할 때, 현재까지 주로 세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낳았다.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법칙으로 잘못 표기했거나,
현상을 조사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논리적이거나 개념적인 법칙을 구성했거나,
그 강도가 너무나 가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과정들을 분리하여 현상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한 도구로 남겨두었다.
나는 이 상황을 더 낙관적으로 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마 모든 역사학자가 그렇듯이 말이다. 우리가 역사와 문화에서 명확한 법칙 아래에서 작동하는 정의 가능한 측정 가능한 과정을 밝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인간 이해에 있어 위대하고 대단히 자극적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태도는 그러한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도록 한다.

 

역사적 재구성(historical reconstructions)문화적 패턴의 현상적 관계를 보고 이해하려는 시도의 한 특별한 형태로, 특별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고 정의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정직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정당한 역사가가 시도하는 여타의 방법론만큼이나 정당성을 가진다고 본다. 때로는 그것이 필수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역사의 전체 목적은 더 크고 점진적인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지, 알려진 내용을 서술하고 다시 서술하는 서사적 실에 무기력하게 또는 기계적으로 집착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 재구성의 결과가 연속적인 데이터에 기반을 둔 해석보다 더 잠정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를 판결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반대로, 문화적 패턴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재구성은 알려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언어적 다리나 예술적 가치조차 없는 허구적 가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인류학은 그 연구 자료의 특성상, 한쪽 발은 과학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야에, 다른 한쪽은 똑바로 역사의 영역에 디디고 있다. 그 중심 주제가 문자 없는 잊혀진 사람들을 다룬다는 점은, 인류학을 단순한 서술에 집착하거나 특정 사건, 특정 개인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도록 하고, 이를 대신 문화 자체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원시 부족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데이터는 그들의 문화이다. 한 번 문화를 의식하게 되면, 인류학이 패턴을 의식하게 되는 데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같은 이유로, 인류학은 과정에 대해서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타일러와 라첼과 같은 개척자들의 시도는 어설프긴 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보아스는 처음으로 우리 모두가 과정 자체를 더 잘 보고 다룰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한 위대한 공헌이며, 또한 그의 비판적 기준의 흔들리지 않는 엄격함이다.

그러나 과정은, 또한 과정이 결코 패턴을 대체하지 못했으며 대체할 수도 없다. 패턴은 모든 역사적 자료에서 고유한 중요성을 계속 유지한다. 두 가지는 단순히 서로 다른 종류의 연구 결과일 뿐이다. 이 두 가지는 갈등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작동하는 과정에 대한 지식을 통해, 패턴은 패턴으로서 분명히 더 잘 이해된다. 본질적인 패턴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문화와 같은 자료에 과정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불완전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접근 방식을 혼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치명적일 것이다. 이 두 접근법은 지적으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결국 두 가지 접근법을 통해 하나의 접근법보다 더 깊이 통하게(penetrative)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정에 대한 과학적 논증 아래에 Q.E.D.(quod erat demonstrandum; περ δει δεξαι; '이상 증명한 내용이었음'라는 뜻으로 주로 수학이나 과학에서 증명을 마쳤을 사용되던 어구)를 작성하거나, 이를 기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이성적인 역사가도 어떠한 작업―역사의 조각이든, 고고학적 선사시대 연구든, 재구성이든, 패턴 공식화든―에서는 Q.E.D.를 작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보다 증명(proof)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을 할 권리가 있다. 증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명하게도 비판적으로 유효한 증명의 결과를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지점에서 멈추는 것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지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한계가 하나의 접근 방식의 한계일지라도, 그것이 모든 지적 노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선 영역이 단순히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골동품 수집가들, 전기 작가들, 이야기 작가들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접근 방식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관심사의 차이에 크게 의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적 접근법에만 관심을 제한하는 것이든, 역사적 접근법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든, 아니면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든, 이는 완전히 정당하다.

그러나 '공감적 관용(sympathetic tolerance)'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하며, 분명히 더 깊은 이해에 유리하다. 이는 곧 '과학'에 유리한 태도이기도 하다.

 

 

 

notes

[1] New Aims and Methods in Social Anthropology (South African Journal of Science, Vol.  30: 74-92, 1933).

[2] Beitrige zur Erkenntniss der Farbe des Wassers (Kiel, 1887).

[3] 순전히 기술적인 면에서의 조직화의 결핍(lack of organization)은 부분적으로, 사멸 위기에 놓인 데이터(perishing data)를 가능한 한 많이 구하려는 절박한 믿음 때문일 수 있으며,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데이터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포함할 수 있다.

[4] Primitive Art (Oslo, 1927), p. 6.

[5] Historical Reconstruction of Culture Growths and Organic Evolution (American An­thropologist, Vol. 33: 149-56, 1931).

[6] The History of Native Culture in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American Archaeology and Ethnology, Vol. 20: 125-42, 1923); The Patwin and Their Neigh­bors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American Archaeology and Ethnology, Vol. 29, No. 4, 1932), pp. 391-420; Yurok and Neighboring Kin Term Systems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American Archaeology and Ethnology, Vol. 35: 15-22, 1934); Archaeologi­cal Explorations in Peru. Part I: Ancient Pottery from Trujillo (Field Museum of Natu­ral History, Anthropology, Memoirs, Vol. 2: 108-14, 1930).

[7] Northern Elements in the Mythology of the Navaho (American Anthropologist, Vol. 10: 371-76, 1897).

[8]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Vol. 21: 177-83.

[9] Problems Arising from the Cultural Position of the Havasupai (American Anthropolo­gist, Vol. 31, 1929), p. 222.

[10] 정통 인도유럽 언어학은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지닌다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고립적이고 고도로 전문화된 자급자족적 분야로 어느 정도 정체된 경향이 있었다. 때론, 이는 약간의 형이상학을 도입하며 이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여전히 철저한 기술적 방법론을 통해 역사적 재구성을 이루는 분야로서 보편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11] 보아스(Boas)의 접촉 수정(contact-modification) 문제는 본질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문제는 대개 그렇듯, 과정(process)과 관련되어 있다. 언어사(history of languages)를 통해 검토된 압도적인 사례들은 내용의 대규모 흡수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음성 형식의 일부 수정도 가능하다는 점을 포함한다. 그러나 구조적 요소의 도입(import)이나 접변(assimilation)은 보통, 내부적으로 발전하는 구조적 성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통적인 언어학자들(strict philologists)의 의견은 이 점에서 특히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통 한 언어 계열(family) 내부의 변화만을 다루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끝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학자들(linguists)도 있으며, 또 필로로지스트들(philologists)도 존재한다. 진정한 문제는 외부로부터의 모방적 차용(imitative borrowing) 과정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발생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으며, 연구할 가치가 있다. 비록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이 자신의 경험상 외부적 요인이 결국 미미한 요소로 판명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보아스의 통찰력에 대한 찬사는, 그가 이 문제를 공식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언어 역사가들에 대한 반박의 도구로 사용하기 전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 있다.

다른 종류의 사례로는, 우렌벡(Uhlenbeck)과 미켈슨(Michelson)이 사피어(Sapir)의 몇몇 발견에 보이는 반대가 있다. 이 반대는 어떤 반역사적 편견(anti-historical bias)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둘 다 엄격한 정통 필로로지 교육을 받으며 그 분야에 지나치게 깊숙이 몰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어떤 언어적 관계도, 그것이 인도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s)에서와 같은 강도로 입증되지 않는 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인도유럽어에는 학생들이 수백 명이지만, 아메리카 언어에는 한 사람만 전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고도로 조직화된 학문의 형식적 규칙(formal code)이 개척 단계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규칙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2] 아마도 문화적 자료를 해부학적 자료만큼 정밀하게 측정하고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통계적 민족학(statistical ethnology)에서 직접적인 측정 대신 사용되는 요소들(element)의 정의는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보아스는 그의 초기 연구 보고서 중 하나에서 요소들(민속적 모티프 또는 에피소드들)을 세어 역사적 전파 경로를 입증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요소들을 주로 과정과 관련된 연구에 사용했다.

[13] 포춘(Fortune)과 번젤(Bunzel)은 접근 방식을 더욱 정밀하게 맞추었다.

[14] 이론적으로 관련이 있는 두 학문, 즉 서유럽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회학(sociology)인류학(anthropology)이 대체로 서로 분리된 상태를 꾸준히 유지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문화사적 문제다. 이는 두 학문이 서로 다른 형태의 충동(im­pulses)에서 비롯되었으며, 서로 다른 목표(ends)를 겨냥했다는 걸 시사한다.

[15] S. A. Rice, ed., Methods in Social Science (Chicago, 1931), pp. 248-65.

 

 

 

번역 송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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