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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S, Franz, 1936, “History and Science in Anthropology: A Reply”, Discussion and Correspondence, American Anthropologists, 38-1: 137~141, (https://doi.org/10.1525/aa.1936.38.1.02a00280).

 

인류학에서의 역사 그리고 과학 :  대답

 

프란츠 보아스

1936

 

크로버(Kroeber) 박사가 나의 과학적 작업과 나의 성격에 대해 분석한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다.[1] 내가 그의 해석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려고 한다. 내가 젊었을 때 물리학지리학 연구에 시간을 쏟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1887년에 나는 이 주제들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으며,[2] 이들의 근본적인 관점상의 다양성에 대한 나의 인식을 표현했다. 나는 명확히, 그 구성 요소들을 공통의 원인으로 환원할 수는 없을지라도 통합된 전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즉, 나를 끌어들인 문제는 바로 '복잡한 현상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지리학(geography)에서 민족학(ethnology)으로 나의 관심이 넘어온 후에도 이 관심이 지속되었다.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 속한다.

크로버는 이러게 썼다.

“역사적 접근법(historical approach)의 독특한 특징은, 전통적으로 보여지듯 시간 순서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충동(historical impulses)이 진정하고 강렬할 때 거의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기술적 통합(descriptive integration)을 추구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과정(process in history)이란, 단지 현상을 현상으로 취급하는 현상 간의 결합(nexus among phenomena)일 뿐이며, 현상에서 찾아내고 추출해야 할 무언가로 간주되지 않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 아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더 잘 이해된 문화에 대한 기술(descriptions of culture)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치 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제대로 수행된다면, 개인의 삶이 문화에 의해 통제되는 방식, 그리고 개인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문화의 작용(working of the culture)에 관해 매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적 해석을 위해 기술적 자료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고고학적, 생물학적, 언어학적, 민족학적 비교가 다소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만약 크로버가 나의 첫 민족학 작업(ethnological work)인 "중앙부 에스키모(The Central Eskimo)"(1885년 집필)를 '역사적'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집단의 일상생활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기반에 묘사이며, 문제들에 대한 나의 무지로 인해 큰 결함 있다. 제기된 유일한 역사적 논점은 연구된 부족을 다른 에스키모 부족이나 매켄지 분지의 인디언들과 비교한 것이며, 초기 에스키모 거주지 유적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그들의 초기 이주 경로에 대한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순수한 묘사에 불과하다. 만약 내가 후속 저술에서 지리적 조건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이유란 1883~1884년에 탐험을 시작하면서 지리적 결정 요인(geographical determinants) 그리고 문화적 삶의 창의적 요소(creative elements in cultural life) 중요하다는 과장된 믿음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리적 조건들이 기존 문화를 제한하고 수정하는 데 있어 관련성을 가진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후 나의 현장 연구에서 이러한 질문이 특별히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 적이 없었다.

 

요즘 기능주의(functionalism) 불리는 측면, 즉 문화의 사회학적 또는 심리학적 해석에 대한 나의 관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건을 크로버에게 상기시켜주고 싶다. 나는 고대 이야기와 관습의 '진정한(true)' 형태는 고려하지 말고, 그에게 아라파호(Arapaho) 전통을 수집하도록 요청한 적이 있다. 당시 많은 민족학자들이 그러한 '진정한' 형태의 발견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수집된 이야기들 중 일부는 극히 거친 내용이었다. 이상적인 인디언(ideal Indian)만을 알고 싶어했던 플레처(Alice C. Fletcher)는 분노하며, 열등한 사회 집단의 '마구간 소년(stable boy)' 같은 태도를 지적했다. 이 때문에 크로버의 작업을 폄하하려 했기 때문에, 나는 "밀교에 대한 민족학적 의의(The Ethnological Significance of Esoteric Doctrines)"[3]라는 짧은 글을 썼다. 여기에서 나는 외적(exoteric) 지식내적(esoteric) 지식 간의 '기능적' 상호 관계를 보여주려 했으며, 스토리텔링에 표현된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 습관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상호 관계에 대해 비슷하게 고려된 걸로 바스티안(Adolf Bastian)을 위한 기념 논문집(1896)에 실린 콰키우틀(Kwakiutl)의 비밀결사에 대한 기고문, 그리고 1904년 제14회 미국학자 회의(Fourteenth Congress of Americanists) 보고서(1906년 출판)에도 같은 주제에 대해 다뤘다. 후자는 문화 행동 패턴 확립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이는 토착 문화 전체가 이웃 문화들과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들만의 구조를 형성해 나가는지에 대해 다룬 문화사적 기여라고 볼 있겠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떤 문화의 역사(history of a culture)를 추적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우리는 간접적인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최대한 신중하게 사용하는 게 우리의 의무이다. 크로버는 내가 이러한 질문들에 관심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내가 왜 내 인생에서 여러 해를 할애하여 북서 해안 지역의 사회 조직, 비밀 결사, 예술 형태의 전파, 민속 설화의 역사적 발전을 밝히려고 노력했는가? 나는 그러한 세부적인 연구가 그 자체로도 가치 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대한 일반적 측면을 조명하기 때문에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개별 문화 안에 반영된 문화적 현상의 총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로버에게는 이처럼 성실한 작업이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승인을 받으려면 규제를 받지 않는 상상력의 비상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크로버가 내가 뉴욕 과학 아카데미 회장으로서 한 공개 강연 "미국 인종의 역사(The History of the American Race)"[4]를 칭찬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강연 초반부에 평소보다 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허용하겠다는 경고를 했다.

이미 1895년에 내가 당시에 이용 가능했던 자료를 신중히 분석하면서 북서 해안 신화들 간의 관계와 이들이 다른 아메리카 그리고 구세계 지역에 미치는 연관성을 보여준 것은 역사적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5] 크로버가 각 요소의 기원을 확립하자던 지점으로 나는 더 나아갔을 것이다. 이 작업이 예외적일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거기서 멈춘 것이다. 특정 현상이 어느 지점에서 최고로 발전했다는 사실로 그 지점이 곧 그 현상의 기원이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는 없다. 나는 이를 정당하지 않은 가정이라고 생각하며, 이와 같은 믿음과 가벼운 증거 평가가 우리의 방법론을 갈라놓는다. 크로버는 내가 결론에 대해 높은 확률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훨씬 더 낮은 확률로 만족한다고 인정했다. 이것은 현대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라 미식가(Epicurean)의 입장이다.

 

내 작업에 대한 요약이 공정하다고 인정할 수 없어 유감이다. 내가 고고학적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의 유일한 기여는 멕시코에서 아르카익(Archaic),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유형, 아즈텍(Aztec) 문명의 순서를 확립한 것이다. 달(Dall)의 알류샨 제도(Aleutian Islands)에 대한 작업을 제외하면, 북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층위학적(stratigraphic) 작업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제섭(Jesup) 탐험 계획에서 나는 고고학적 작업에 중요한 부분을 할당했고, 신중한 스미스(Harlan I. Smith)의 손으로 프레이저 강(Fraser River)에서 내륙 문화의 침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더 북쪽에서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이유는 관심 부족이 아니라 중요한 자료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해마다 과학계 사람들에게 북알래스카에서 신중한 고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작업은 감각적인 예술적 발견들에 의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났으며, 주요 문제는 여전히 베링해(Bering Sea) 지역에서 선(先) 에스키모(pre-Eskimo) 유형의 발생 여부에 관한 것이다.

 

언어학적 작업과 관련하여, 크로버의 비판은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 간의 관계는 역사 연구의 강력한 도구이다. 순수한 유전적 관계를 가정하든, 아니면 접촉을 통해 언어가 상호 영향을 광범위하게 미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든 간에, 이 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질문은 관계에 대한 해석에 있어 중요하지만, 역사적 접근인지 혹은 비역사적 접근인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어학적 데이터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도 그렇듯, 근거 없는 추측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 논의와는 무관하다. 여기서도 40%의 가능성은 나에게 만족스러운 증거가 될 수 없다.

 

크로버가 내 책 『원시 예술(Primitive Art)』에 대해 가한 비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스타일(style)이 다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에는 스타일에 대한 하나의 장이 있고, 문제를 다루는 예로 북서 해안(Northwest Coast) 스타일에 대한 특정 장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크로버는 자신만의 '스타일'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역사' 개념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내가 북서 해안 스타일의 역사를 쓰지 않았다고 나를 비판한다. 불행히도, 그 발전에 대해 어떤 조명을 비출 만한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스타일은 완전한 형태로 나타나며, 백인 접촉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다. 약간의 지역적 차이와 에스키모 그리고 다른 인접 부족의 예술 사이의 관계는 나에게 이 주제에 대해 어떤 통찰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데이터 없이 그 역사를 쓰라는 것인가? 나더러 슐츠(Schurtz)의 황당한 추측들을 반복하라는 건가?

 

나는 역사가 정당하고 타당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역사적 재구성이 불완전하고 무익하다고 말한 적도 없다. 사실, 어떤 민족학자라도 연구한 "원시 민족의 모든 역사"는 재구성된 것이며, 그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확정된 데이터에 기반한 신중한 재구성과, 어느 정도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포괄적 일반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인종의 분포와 관계, 아메리카 대륙과 구세계의 관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관계 등과 같은 다수의 매우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립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의 강도는 전적으로 증거에 의존한다. 내가 신중하게 제시한 제안(suggestion cautiously)이, 마치 내가 고정된 교리(set dogma)처럼 발표한 것인 양 반복된 일이 너무도 자주 벌어졌다.

 

다음으로, 통계(statistics)를 민족학 연구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통계 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나는 그것이 민족학적 탐구에서 안전한 안내자가 아니라고 믿는다. 1888년 타일러(Tylor)의 논의 이후, 나는 신화 분야에 이를 처음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한다.[6] 만약 그 당시 상관관계 방법이 지금처럼 남용되었거나, 내가 그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신화 요소를 위한 멋진 상관계수(coefficients of correlation)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7] 그러나 민족학 데이터는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되어 간단한 수치 비교 이상의 설득력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통계 분석 뒤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다. 나열된 자료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비교 가능한가? 또는 타일러가 제시한 것과 같은 다른 유형의 문제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독립적인가?

 

크로버가 체질 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에 대한 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우리는 항상 인종(race)에 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인종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내가 체질 인류학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첫 번째 자극은 홀(G. Stanley Hall)과 클락 대학교(Clark University)의 분위기 덕분이었으며, 이는 인종 문제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환경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다가 인종 문제를 고려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 작업의 형식성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왜 특정 측정값을 취했는지, 왜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는지에 관한 질문에 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후로 나의 관심은 이러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으며, 체질 인류학 데이터가 역사적 문제를 밝히는 데 사용되기 전에 반드시 이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에게 똑같이 중요한 또 다른 질문은 신체 기능이 신체 구조에 얼마나 의존적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인종 생리학(racial physiology) 그리고 심리학과 관련된 어떤 지적인 논의에서도 필수적인 기초가 된다.

 

크로버는 1928년 뉴욕에서 열린 미국학자 회의(Americanist Congress)에서의 인류학적 방법론에 대한 토론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온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토론은 전적으로 '문화 영역(Kulturkreise)'와 다른 역사적 재구성 시도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마침내 나는 살아오는 동안 연구 중인 문화를 역사적 성장의 결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 토론이 역사적 순서(historic sequences)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나는 악마의 대변자(advocatus diaboli)로 나서서 역사적 변화가 이루어진 과정(processes by which historical changes came about)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대변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전체 그림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데 필요하다. 이는 내가 이전부터 보여준 입장에 비해 새로운 것이 아니며, 앞서 충분히 명확히 드러났다고 본다.

토론의 참여자들이 대체로 '과정(processes)'에 대한 연구를 터부시하고 자신들이 확실히 입증되었다고 여기는 자신만의 이론에 집착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FRANZ BOAS

COLUMBIA UNIVERSITY

NEW YORK CITY

 

 

[1] American Anthropologist, Vol. 37, pp. 539-69, 1935.

[2] The Study of Geography (Science, Vol. 9, pp. 137-41, 1887).

[3] Science, n.s., Vol. 16, pp. 872-74, 1902.

[4]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Vol. 21, pp. 177-83, 1912.

[5] Indianische Sagen von der Nord-Pacifischen Kiiste Amerikas (Berlin, 1895).

[6] Journal,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Vol. 18, pp. 245-72, 1889.

[7] Indianische Sagen, pp. 341 et seq.

 

 

 

 

번역 송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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