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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피부 (테렌스 터너, 1980)

zingari.JQ 2026. 9. 18. 16:28

TURNER, Terence S., 2012[1980], “The Social Skin”,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2-2: 486~504. https://doi.org/10.14318/hau2.2.026.

 

「사회적 피부」

 

테런스 S.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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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에는 챕터 구분과 제목이 없으나, 번역문에는 가독성을 위해 챕터 제목을 넣고, 대괄호 [ ] 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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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체 표면 그리고 사회적 정체성]

 

인간은 벌거벗은 채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옷을 입고 있다. 또는 옷만큼의 상징적 등가물을 걸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얼마간 이야기할 수 있을 같다.

 

일상적인 단정함이나 신성한 복식, 아름다움이나 장엄함, 지위나 지위 변화에 관한 사회적 관념에 따라, 또는 그러한 관념을 위반하거나 뒤집는 상황에서 인간의 몸을 장식하고, 가리고, 드러내거나 달리 변형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모든 인간 사회의 관심사였던 듯하다.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이 사실은 좀 더 주관적인 성격을 띤 또 하나의 사실과 연결된다 —신체 표면은 어디에서나 생물학적·심리적 실체인 개인의 경계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자아(social self)의 경계로도 다루어지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 두 실체는 상당히 다르고, 문화를 달리하면 이 둘을 규정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지므로, 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지만 그와 관련된 문제들은 모든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개인을 ‘사회화(socialising)’하는 방식, 즉 개인을 아동기에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자신이 속한 사회에 통합하는 방식이 그 해결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사회적 자아, 심리·생물학적 개인(psycho-biological individual)이 함께 맞닿는 경계면인 신체 표면은 사회화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상징적 무대가 된다. 신체 장식(bodily adornment)은 문화마다 다양한 형태(신체 채색에서 의복에 이르기까지, 깃털 머리장식에서 화장품에 이르기까지)로 그 드라마를 표현하는 언어가 된다.

 

몸을 장식하고 남들 앞에 내보이는 일은 개인들에게는 아무리 하찮거나 심지어 경박한 일로 보일지라도, 문화에는 중대한 문제다. 뒤르켐(Durkheim)이 종교에 관해 말했듯이, 그것은 진지한 삶(de la vie sérieuse)’에 속하는 일이다. 와일드(Wilde)는 유행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사람에게 자기 종교에서도 좀처럼 얻지 못하는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준다고 보았다. 우리가 복식(dress)과 외모의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진지한(serious)’ 성품의 징표 아니면 심각한 심리적 문제의 징표로 간주하는 데서 드러난다. 체스터필드(Chesterfield) 경은 이렇게 말했다.

 

> 옷차림은 몹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자기 지위와 생활 방식에 맞게 옷을 잘 차려입지 않는 것 또한 몹시 어리석은 일이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만큼 옷을 잘 차려입는 것은 그 사람의 분별력을 깎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입증한다. 이 점에서 분별 있는 사람과 멋만 부리는 사람의 차이는, 멋만 부리는 사람은 옷차림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반면, 분별 있는 사람은 옷차림을 비웃으면서도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Bell 1949: 13에서 재인용).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분별 있는 사람이 경멸과 주의(contempt and attentiveness)를 뒤섞은 태도로 옷차림을 대해야 한다는 명시적 주장(explicit assertion)이 아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따라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those he lives with)’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외모를 유지해 스스로를 분별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암묵적 주장(implicit claim)이다. 자신이 비웃는 관행을 따르는 데 그 ‘감각(sense)’이 있는 사람의 불편한 양가감정은, 18세기에 그랬듯 오늘날에도 충격적인 것으로 보이는 한 진실에 대한 의식이다. 그 진실이란 우리가 이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문화가, 우리의 사회적 지위·태도·욕망·신념·이상(요컨대 우리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필요한 매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자각하고 심지어 경멸하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그러한 정체성 자체를 상당 부분 구성한다는 것이다. 복식과 신체 장식은 그러한 문화적 매체의 하나를 이루며, 아마도 개인적·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특화된 매체일 것이다.

 

 

# [2. 카야포의 사회조직과 청결]

 

카야포(Kayapo)는 아마존 삼림의 남쪽 가장자리에 사는 원주민 부족이다.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흩어져 있는 마을들에 거주하며, 마을 인구는 수백 명에 이르기도 한다. 경제는 삼림 원예농업과 수렵·채집을 결합한 형태다. 마을의 사회조직은 비교적 복잡한 제도 체계에 기초하며, 이 제도들은 명확히 규정되어 있고 주민 전체에 걸쳐 동일하게 적용된다. 기본적인 사회 단위는 확대가족 가구(extended family household)다. 그 거주 방식은 남성이 소년기에 어머니의 가구를 떠나고, 결혼하면 아내의 가구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그 사이 미혼 남성은 ‘남성의 집(men’s house)’에서 생활한다. 이 집은 대체로 원형 마을 광장의 중앙에 세워지며, 광장 가장자리에는 ‘여성의 집들(women’s houses)’(확대가족 가구를 이렇게 부른다)이 늘어서 있다. 반면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태어난 가구에 머문다.

 

카야포에게는 ‘복식’이라고 부를 만한 매우 정교한 부호 체계(elaborate code)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복의 사용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서구의 무심한 관찰자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한편 잘 차려 꾸민 카야포 성인 남성을 본다면, 아무리 둔감한 여행자라도 카야포가 신체 장식의 기예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커다란 아랫입술 장식(지름이 약 6센티미터인 작은 접시 모양의 원반)을 끼우고, 음경 덮개(penis sheath, ‘귀두’를 덮는 야자 잎으로 만든 작은 원뿔)를 착용한다. 귓불에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 작은 구슬 줄들을 드리우고, 온몸에는 빨강과 검정 무늬를 칠한다. 눈썹·속눈썹·수염은 뽑아 없애고, 머리는 정수리의 한 점을 향하도록 밀되 옆과 뒤의 머리카락은 길게 남겨 둔다. 그러나 인류학자를 포함하여, 이러한 이국적인 장식물을 피상적으로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것들이 착용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의미와 가치의 체계를 알아보려고 수고한 서구 관찰자는 극히 드물다. 카야포의 신체 장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겉보기에 벌거벗은 야만인이 실은 가장 정교하게 차려입은 빅토리아 시대의 숙녀나 신사 못지않게 문화적 의미의 직물로 온몸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체의 외양이 어떠해야 적절한가에 관한 카야포의 관념에서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청결(cleanliness)의 중요성이다. 모든 카야포는 하루에 적어도 한 번 목욕한다. 더러운 상태로 있는 것, 특히 살코기·피·그 밖의 동물성 물질이나 음식의 흔적을 피부에 남겨 두는 것은 단지 단정하지 못하거나 불결한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사회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그것은 씻지 않은 사람의 건강에 위험하다. ‘건강(health)’은 사회적 세계에 완전하고 적절하게 통합된 상태로 이해되는 반면, 질병(illness)은 자연의 힘, 특히 동물의 힘이 사회 관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체 표면에서 모든 ‘자연적’ 부착물을 제거하는 청결은 자아와 사회의 접면을 ‘사회화’하는 필수적인 첫 단계다. 그 접면은 구체적으로 피부에 구현되어 있다. 얼굴과 몸의 을 제거하는 것도 이와 같은 기본 원리를 따른다. 곧 피부를 물리적 몸의 단순한 ‘자연적(natural)’ 외피에서, 그 아래에 놓인 생물학적 힘과 리비도적 에너지(libidinal energies)를 사회적 형태(social form)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여과막으로 바꾸는 원리다.

 

 

# [3. 머리카락과 생식력의 사회화]

 

체모를 언급했으니 이제 머리카락(hair of the head)을 다루는 방식으로 논의를 옮겨 보자. 머리 손질을 지배하는 원리들은 청결·위생·사회성에 관한 일반적 관념과 일치하지만, 훨씬 더 발전되어 있다. 또한 카야포가 체모와 구별되는 것으로 강조하는 머리카락의 특성에 부합한다. (머리카락은 체모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머리카락은 피부처럼 신체 표면의 ‘자연적’ 일부지만, 피부와 달리 계속 바깥으로 자라나 몸을 뚫고 그 너머의 사회적 공간으로 나온다. 몸 안, 피부 아래에서는 살아 있고 자라지만, 몸 밖, 피부 너머에서는 죽어 있고 감각도 없다. 그렇지만 그 성장은 몸 안의 사회화되지 않은 생물학적 힘을 드러낸다. 이처럼 머리카락은 몸 안의 ‘자연적’인 생물학적·리비도적 힘과 외부의 사회 관계 영역 사이에 놓인 경계의 역동적이고 불안정한 성질을 집약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머리카락은 자아의 리비도적 에너지, 그리고 그 에너지가 사회적 공간으로 분출하는 것을 용인 가능한 형태 안에 가두려는 끝없는 투쟁의 상징이 된다.

 

머리카락에 사회화 기능이 집중되어 나타나는 이 상징적 역할은 카야포뿐 아니라 브라질 중부의 부족들 전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 때문에 머리 모양(coiffure)의 차이는 한 부족을 다른 부족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가시적 수단이 되었다. 각 집단은 고유한 머리 모양을 지니며, 그것은 자신의 문화와 사회공동체를 나타내는 표상이 된다(따라서 그들 자신의 눈에는 인류가 도달한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남녀 모두가 하는 카야포 부족의 머리 모양은 이마 위쪽에서 정수리의 한 점을 향하는 삼각형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밀고, 머리 뒤와 양옆의 머리카락은 길게 남겨 두는 것이다. (다만 뒤에서 설명하듯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예외다.) 남성들은 삼각형으로 밀어 낸 부분의 꼭짓점에 V자형으로 뾰족한 작은 머리카락 술을 세워 올리기도 한다. 이 부분의 양옆에는 기하학적 무늬의 띠를 검정으로 칠하는 경우가 많다.

 

카야포 사회에서 특정 범주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를 특권(privileged)’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짧게 잘라 두어야 한다. 젖먹이, 아이를 낳은 여성, 음경 덮개를 받고 입문 의례(initiation)를 거친 남성(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다. 남녀 아동과 청소년(여성은 젖을 뗀 때부터 출산할 때까지, 남성은 젖을 뗀 때부터 입문 의례를 치를 때까지), 그리고 가까운 가족 구성원(예를 들어 배우자·형제자매·자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

 

이처럼 긴 머리와 짧은 머리가 사회적으로 분포하는 양상을 이해하려면 가족 관계의 본질(nature of family relations)에 관한 카야포의 관념을 이해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자매는 단순한 사회적·정서적 유대보다 더 깊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 끈은 수태와 자궁을 통해 함께 나누는 공통의 신체적 물질(common physical substance)이 일종의 영적인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된다. 생물학적 존재를 함께 나누는 이 관계는 평생 지속되지만 죽음에 의해 끊어진다. 따라서 자녀나 형제자매의 죽음은 그 사람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와 에너지를 직접 감소시킨다. 배우자들에게는 혈연 관계에 내재하는 생물학적 연결이 없지만, 그들의 성적 관계는 그에 상응하는 ‘자연적’인 생식·리비도 공동체를 이룬다. 이 두 종류의 생물학적 관계가 모두 죽음에 의해 끊어지는 만큼, 자아의 생물학적 에너지가 사회적 공간으로 연장된 것으로 이해되는 머리카락을 잘라 내는 것은 자녀뿐 아니라 배우자의 죽음에도 상징적으로 적절한 반응이다.

 

같은 구체적 논리가 아동의 머리카락(children’s hair)을 다루는 방식도 설명해 준다. 아이가 아직 젖을 먹는 동안에는 여전히, 말하자면 부모의 생물학적 존재와 에너지의 연장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어머니의 연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유(nursing)는 일종의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약화된 임신의 마지막 단계다. 젖떼기(weaning)는 아이가 별개의 생물학적·사회적 존재로 ‘탄생(birth)’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따라서 젖먹이의 머리카락은 결코 자르지 않으며, 성적으로 활동하는 성인의 머리카락만큼 길게 자라도록 내버려 둔다. 이 단계의 영아들은 여전히 머리카락이 긴 부모의 생물학적·성적 존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젖떼기를 시작할 때 영아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성적 연속성의 단절(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 연속성의 억압)을 적절히 상징한다. 그 뒤로 아이의 머리카락은 계속 짧게 유지된다. 한편으로는 부모에게서 생물학적으로 분리되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물학적·성적 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지다. 그 능력이 충분히 강해져 성관계와 생식을 통해 새로운 가족의 토대로서 사회적으로 연장될 수 있게 되면, 머리카락은 다시 온전히 길게 자라도록 허용된다. 남성은 사춘기, 구체적으로 음경 덮개를 받을 때 이 시점에 이른다고 여겨진다. 이상적으로는 그 뒤 곧 입문 의례가 이어진다. (이는 그 자체로 구속력 있는 결합이라기보다 혼인 가능성, 곧 ‘미혼 성인 남성의 지위’를 알리는 상징적 ‘혼인’이다.)

 

남녀가 다시 긴 머리로 돌아가는 시점의 차이는 각 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카야포 관념의 근본적 차이를 반영한다. 카야포에게 ‘사회(society)’를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남성의 집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결사(communal societies)연령 집단(age sets)의 체계다. 여성에게도 자신들만의 특정 결사들이 있지만, 이 집단 조직들은 남성의 집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 주로 남성의 영역이다. 공동체 결사는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기준에 따라 규정되는데, 이 기준은 언제나 가족이나 가구 구조의 중요한 변화에 뒤따르는 결과로 규정된다. (예컨대 소년이 어머니의 가족 가구에서 나와 남성의 집으로 옮기는 일, 혼인, 자녀의 출생 등이 그러하다.) 가족 관계의 이러한 변화 자체는 성장과 성적 발달 과정의 중요한 시점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공동체 집단의 구조(structure of communal groups)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카야포 사회조직의 하위 수준 또는 개인적 영역을 이루는 확대가족 가구의 구조까지 재생산하는 일종의 사회학적 장치를 이룬다. 한편 이 공동체적 제도 구조 자체는 남성의 생물학적·성적 발달의 여러 단계에 따라 규정된다. (여성의 발달도 관련되지만 그 정도는 훨씬 작다.) 이 모든 것은 남성들이 자신의 ‘자연적’인 생물학적·리비도적 힘을 집단적인 사회적 형태로 변환해 사회를 재생산한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관념은 카야포 신화에서 상세히 전개된다.

 

반면 여성들은 자연적·생물학적 개인을 재생산하며, 그에 수반하여 기초가족(elementary family)도 재생산한다. 카야포는 기초가족을 본질적으로 신체적인 관계들의 ‘자연적’ 집합, 또는 사회적 질서의 하위 층위(infra-social)에 있는 집합으로 이해한다. 카야포의 전체 체계가 ‘자연적’ 힘을 편입(cooption)하여 사회적 형태로 이끄는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여성의 생물학적 생식력은 남성이 재생산하는 사회 관계 구조의 틀 안에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여성의 생물학적 생식력이 실제로 사회적으로 연장되는 것은 혼인·남편·가구라는 맥락 안에서 첫아이를 낳는 순간이다. 따라서 바로 이때 여성이 다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기 시작한다. 앞에서 보았듯 남성에게는 리비도적 에너지 또는 생식력이 결정적으로 사회에 편입되는 시점이 더 일찍 찾아온다. 그 힘들이 집단적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위해 공적으로 전유되는 시점이다. 사춘기에 음경 덮개를 수여하는 행위가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그렇다면 음경 덮개는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을 위해 남성의 생식 능력을 집단적으로 전유(appropriation)하는 것을 상징한다. 카야포에게 ‘자연적’ 또는 생물학적 힘을 사회적 목적으로 전유한다는 것은 그 힘의 ‘자연적’인, 곧 사회적으로 제약받지 않는 표현 형태를 억제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음경 덮개는 남성의 성적 능력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현상, 한마디로 발기를 실제로 억제해 남성의 리비도적 에너지를 사회적 형태로 이끄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야자 잎을 엮어 만든 작은 원뿔인 이 덮개는 넓은 쪽 끝과 좁은 쪽 끝이 모두 뚫려 있다. 넓은 쪽은 음경 끝에 씌우고, 좁은 쪽에는 포피를 잡아당겨 통과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있다. 포피를 당겨 빼내면 그것이 뭉치면서 덮개를 귀두 위에 고정하고 음경 전체를 몸 쪽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은 분명히 발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남들 앞에서 발기하는 것, 심지어 발기하지 않더라도 포피 밖으로 귀두가 드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카야포 남성에게 서구인이 자기 동네나 직장을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덮개의 상징적 의미를 이루는 토대는 바로 그러한 사태를 막는 기능이다.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기르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본질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한 관념 체계 전체를 규정하고 표현하는 부호 체계가 되듯이, 다른 종류의 신체 장식도 같은 기본적 관계의 다른 양상들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 [4. 귀와 입: 이해·발화·권위]

 

귓불을 뚫는 것(pierced ears), 귓불-플러그(ear-plugs), 입술-플러그(lip-plugs)도 그와 비슷하게 하나의 뚜렷한 사회적 의미 복합체를 이룬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성적 능력의 사회화가 아니라 이해 능력과 능동적 자기표현 능력의 사회화다. 카야포는 앎의 수용적 방식 그리고 능동적 방식을 구분한다. 수용적 이해(passive understanding)는 듣기와 연결되고, 사물을 만들고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관한 능동적 앎(active knowledge)은 보기와 연결된다. 수용적 이해 능력의 사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언어를 ‘듣는(hear)’ 능력의 발달이다.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귀에 구멍이 있다(having a hole in one’s ear)’고 표현하며,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귀의 구멍이 막혀 있다(to have the hole in one’s ear closed off)’고 표현한다. 남녀 영아 모두의 귓불에 구멍을 뚫고, 빨갛게 칠한 커다란 시가 모양의 귓불-플러그를 넣어 구멍의 지름을 2~3센티미터로 늘린다. (빨간색의 의미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젖을 뗄 때(그때쯤 아이는 이미 말하고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 상태다) 귓불-플러그를 빼고 구멍이 닫히지 않도록 귀걸이 같은 작은 구슬 줄을 꿰어 묶는다. 카야포는 성인기 내내 이 구슬 귀걸이를 계속 달거나, 귓불의 구멍을 그저 비워 둔다. 나는 영아기에 일찍부터 귓불-플러그를 사용하여 이 이차적이고 사회적인 ‘귀의 구멍(holes-in-the-ear)’을 뚫고 늘리는 일이, 영아기 첫 몇 년 동안 일어나는 이해 능력의 사회화, 곧 언어와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것에 귀를 여는 일의 은유라고 생각한다.

 

노년 남성에게서 그토록 커지는 입술-플러그는 카야포의 치장 가운데 단연 가장 눈에 띄는 물건이다. 입술을 뚫는 것은 남성뿐이다. 출생 직후에 구멍을 뚫지만, 처음에는 구멍을 열어 두기 위해 조개껍데기 조각이 달린 구슬 줄만 끼워 둔다. 입문 의례를 마친 젊은 미혼 남성들은 점점 더 큰 나무 핀을 구멍에 끼워 그것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러한 점진적 과정은 성인 남성기의 초기에 계속되다가, 남성이 ‘많은 자녀의 아버지들(fathers-of-many children)’이라는 상위 남성 지위단계에 올라서면 속도가 빨라진다. 이들은 아내의 가구에서 가장이 될 만한 나이에 이른 남성들이다. 결혼한 딸들이 있고, 따라서 사위들이 준피부양자의 지위로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이러한 남성들은 상당한 사회적 권위를 갖지만, 그 권위를 가구 내부에서(가구는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행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의 남성의 집이라는 공적 장에서 정치적 연설(political oratory)의 형태로 행사한다. 화려하고 허세 섞인 스타일의 공적 발화는 상위 남성 지위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이며, 정치권력의 핵심 매체다. 그보다 더 특수화된 발화 형식인 ‘ben’이라는 일종의 운율적 창송은 추장들만의 고유한 특권이다. 추장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가장 잘 구현하는 이 활동에 따라 ‘창송자들(chanters)’이라고 불린다.

 

공적 발화와, 그것의 한층 더 정련되고 강력한 형태인 창송은 정치적 위계가 짜인 카야포 사회가 지닌 가치를 가장 고도로 표현한다. 상위 지위의 노년 남성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추장들은 이 위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공적 활동인 연설과 창송(oratory and chanting)은 카야포 사회질서에 내포된 가치인 이러한 지배적 우위(dominance)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노년 남성의 입술-플러그는 연설가가 말로 드러내는 강한 자기주장과 우월한 지위를 신체적으로 표현해, 자신이 그 고유한 표지가 되는 노년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갖는 지배적 우위와 표현 능력을 구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년 남성의 입술-플러그는 남녀 모두의 뚫린 귓불, 그리고 그 구멍을 만들어 낸 영아기의 귓불-플러그를 보완(complement)하는 짝이다. 전자는 사회질서를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정치적으로 구성하는 것과 연결되는 반면, 후자는 그러한 표현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모든 사회화된 사람의 속성으로 나타낸다. 말하기와 ‘듣기(hearing)’(이해하고 따르기)는 카야포의 정치체를 구성하는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기능이다. 신체 장식이라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모든 카야포의 몸은 카야포 정치(body politic)의 소우주가 된다.

 

남성은 노년기에 접어들면 활발한 정치생활에서 물러난다. 공적으로 발언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발언할 때도 어느 한편을 들기보다는 공통의 가치와 이해관계에 호소하는 원로의 역할(elder statesman’s role)을 맡는다. 정치적으로 활발한 노년 남성의 역할에서, 활동성은 덜하지만 더욱 명예적인 원로의 역할로 옮겨 가는 변화는 이번에도 입술-플러그의 스타일과 형태 변화로 표시된다. 가장 단순한 변화는 익숙한 나무 원반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카야포의 모든 복식 가운데 가장 귀중하고 명성 높은 물건을 사용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노년 남성만이 착용하는, 수정을 갈고 닦아 만든 원통형 입술-플러그다. 길이가 6인치, 지름이 1인치에 이르기도 하는 이 신석기적 귀중품에는 입술 구멍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위쪽 끝에 작은 돌출 테두리가 두 개 있다.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이 들며,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진다. 색은 대체로 투명한 것에서 유백색에 이른다. 흰색은 노년과 유령과 연결되며,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카야포의 두 주요 색인 검정과 빨강이 그 성질을 환기하는 사회적 분할과 변환을 초월(transcendence)하는 것과 연결된다. 사회적 갈등을 넘어서고, 리비도적 에너지를 억제·전유하여 사회적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데서도 벗어나는 이러한 성격은 노년 남성의 연설 내용의 특징이다. 이 과정들은 카야포의 공적 삶을 정치적·의례적 측면에서 구성한다. 바로 이러한 초월의 성격이 그 연설에, 비교적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큰 명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입술-플러그의 상징적 성질이 착용자의 말이 지닌 사회적 성질과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5. 신체 채색의 색과 스타일]

 

서구식 의복이 들어오기 전에는 남녀노소 모든 카야포가 늘 몸에 색을 칠한 채 지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러하며, 특히 더 외딴 마을들에서 그렇다.) 카야포는 신체 채색(body painting)을 하나의 예술로 발전시켰으며,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 무늬의 다양함과 정교함에 압도되기 쉽다. 그러나 분석해 보면 몇 가지 단순한 원리가 다양한 형태와 스타일을 관통하면서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한다(a few simple principles run through the variation of forms and styles and lend coherence to the whole)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카야포의 신체 장식이 전달하는 전체 의미 체계에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한다고 볼 수 있다.

 

카야포의 신체 채색 예술에는 두 가지 주요 측면이 있다. 하나는 주로 사용하는 두 색, 빨강과 검정을 신체의 서로 다른 구역에 대응시키는 방식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검정을 사용하는 신체 부위를 칠할 때 쓰는 두 가지 기본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측면을 살펴보자. 검정과 빨강(black and red)이라는 두 색의 사용, 그리고 그것들을 신체의 서로 다른 부위에 대응시키는 방식은 생물학적 존재이자 사회적 행위자(social actor)로서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한 카야포 관념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검정은 몸통·상완·허벅지에 칠한다. 뺨과 이마에도 검정 무늬나 줄무늬를 그리며, 때로는 눈이나 입을 가로질러 그리기도 한다. 빨강은 종아리와 발, 전완과 손, 그리고 얼굴, 특히 눈 주위에 칠한다. 때로는 얼굴 전체를 빨갛게 만들기 위해 이미 얼굴에 그려 놓은 검정 무늬 위에 빨강을 덧바르기도 한다.

 

검정은 사회와 사회화되지 않은 자연 사이의 변환(transformation)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검정을 뜻하는 말은 ‘야생(wild)’의 숲(자연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가는 마을 바로 바깥의 구역에도 쓰인다. 또한 죽음(death)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죽음은 시신이 아직 썩어 가고, 영혼이 사회적 유대를 버리고 유령이 되지는 않은 첫 단계를 뜻한다. 유령은 흰색이다.) 이 두 용법에서 모두 검정을 뜻하는 말은 사회적 세계와, 본래 의미의 사회에서 차단되어 그 경계 너머에 놓인 자연적 또는 사회적 질서의 하위 층위에 있는 힘들의 세계 사이에 놓인 공간적·시간적 이행 구역에 적용된다. 따라서 신체의 ‘자연적’ 힘과 에너지가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부위들(몸통·내장·생식기관·주요 근육 등)의 표면에 검정을 칠하는 것은 적절하다. 이 부위들은 그 자체로 사회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프로이트(Freud)의 이드(id) 개념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검게 칠한 피부는 개인의 자연적 힘과 외부의 사회 관계 영역 사이에 놓인 억압의 경계가 된다.

 

반면 빨강활력·에너지·강화(vitality, energy and intensification)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빨강은 외부 세계와 직접 접촉(contact)하는 신체의 말단 부위(손발과 감각기관, 특히 눈이 있는 얼굴)에 칠한다. 여기서 작용하는 원리는 개인이 외부 세계(주로 사회적 세계)와 관계 맺는 능력을 강화하는 것인 듯하다. ‘빨강’의 작용(강화·활성화)과 ‘검정’의 억압 사이의 대립이 신체의 ‘말단부(peripheral)’와 ‘중심부(central)’ 사이의 대립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말단부와 중심부의 대립 자체는 각각 신체의 ‘표면(surface)’과 ‘내부(inside)’ 사이의 관계가 취하는 한 형태로 다루어진다. 따라서 두 색을 대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몸과 그 힘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고, 그 분류를 신체 장식 체계 전체의 토대에 놓인 ‘내부:표면:외부(inside: surface: outside)’라는 개념적 대립 관계와 다시 연결한다.

 

이제 신체 채색 체계의 두 번째 주요 측면, 즉 검정으로 칠하는 두 가지 주요 스타일로 넘어가자. 가장 좋은 출발점은 한 스타일은 주로 아동에게, 다른 스타일은 주로 성인에게 사용된다는 관찰이다. 아동의 스타일이 훨씬 더 정교하다. 나뭇잎의 가운데 잎맥으로 만든 가느다란 그리개로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를 검정으로 그린다. 아이의 몸은 목에서 무릎 아래까지, 그리고 팔을 따라 팔꿈치 아래까지 전체가 무늬로 덮인다. 제대로 하려면 두어 시간이 걸린다. 어머니들은(때로는 아이를 몹시 아끼는 이모·고모나 할머니들도) 아이들을 ‘잘 차려입힌(well dressed)’ 상태로 유지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많은 시간을 쓴다.

 

이 스타일은 하나하나로는 별 의미가 없는 수많은 선과 점 등으로부터 전체적으로 일관된 무늬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완성된 결과는 눈송이가 저마다 다르듯 하나뿐인 것이다. 무늬가 지닌 이러한 개별적 특성은 칠하는 사람과 장식되는 아이의 관계를 반영한다. 한 번에 오직 한 아이만, 자기 집에서 자기 어머니나 다른 친족에게 몸을 칠해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어린아이의 사회적 위치와 그 아이가 거치는 사회화 과정의 성격을 반영한다. 아이는 하나하나로는 질서가 없는 무수한 요소로부터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길고 집중적인 과정의 대상이다. 아이는 가만히 누워 이 과정에 몸을 맡겨야 하며,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훈육이 필요하다. 완성된 결과물은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와 가구와 맺는 관계를 고유하게 표현한다. 다른 가족의 아이들과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집단적으로 정형화된 무늬가 아니다. 이 역시 특정한 자기 가족의 수준을 넘어 공동체 사회에 통합되어 있지 않은 아이의 사회적 상황과 부합한다.

 

소년들은 집을 떠나 남성의 집에서 살게 되면, 드물게 있는 의례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이런 방식(this way)으로 몸을 칠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든 소녀들과 성인 여성들은 때때로 소일거리로 계속 이런 방식으로 서로의 몸을 칠한다. 여성들이 이 아동기 스타일을 사용하는 것은, 남성들이 공동체 수준의 집단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달리, 여성들이 여전히 각자의 가족과 가구에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를 반영한다.

 

두 번째 스타일은 주로 성인과 연결된다. 다만 어머니에게 첫 번째 스타일로 본격적인 작업을 할 시간이나 마음이 없을 때는 아동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이 스타일은 표준화된 무늬들로 이루어지며, 많은 무늬에 이름이 있다. (대체로 그 무늬가 닮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의 이름이다.) 이 무늬들은 단순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리개 방식 대신 손으로 빠르게 칠할 수 있는 넓은 획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칠하는 사회적 맥락은 전형적으로 집단적이다. 남성의 집에 모인 남성 연령 집단이나, 서로의 몸을 칠하려고 2주마다 마을 광장에 모이는 여성 결사(women’s societies)가 그러한 예다. 이런 때에는 보통 집단 전체가 같은 스타일을 사용한다. (미혼 남성과 성숙한 남성처럼 구조적으로 구별되는 집단들을 구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스타일을 사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두 번째 스타일은 전형적으로 충분히 사회화된 성인들이 집단적 자격(collective capacity)으로 행동할 때 사용한다. (개별 가족의 수준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구조에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수준에서 행동할 때다.) 집단적 행위는 대체로 의례적 성격을 띠며(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의 구조를 직접 구성하고 재생산한다는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화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성인 스타일로 몸을 칠한 사람들은 ‘사회화의 대상(objects of socialisation)’이라는 자격이 아니라 사회화를 수행하는 ‘행위자(agents)’로서 행동한다. 무늬의 ‘동물적(animal)’ 성질은 이 역할을 환기한다. 카야포는 공동체 의례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적 활동을, 집단적·사회적 반복 재현(collective social replication)을 통해 ‘자연적’ 또는 동물적 성질을 사회적 형태로 변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집단 활동에 수반하여 사회집단 구성원들에게 집단적으로 칠해지는 ‘동물’ 무늬의 성인 스타일은 이러한 의미와 관념을 집약한다. 따라서 아동과 성인의 신체 채색 스타일 사이의 대비(contrasts)는 아동과 성인의 사회적 속성에서 나타나는 핵심적 대비를 모형화(model key contrasts)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들의 상대적인 사회적 통합 수준, 달리 말해 같은 뜻인 ‘사회화’의 정도에서 나타나는 대비다.

 

 

# [6. 의례 그리고 사회적 분류]

 

카야포 공동체 활동의 대부분은 길고 복잡한 의례(long and complex ceremonies)를 거행하는 일로 이루어진다. 의례는 대체로 마을의 모든 남성과 소년, 또는 모든 여성과 소녀가 함께 춤추는 형태를 취하며, 때로는 남녀 모두가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성한 행사는 언제나 집단적인 신체 채색과 부족 패턴(tribal pattern)으로 새로 손질한 머리 모양, 그리고 수많은 특수한 의례 장식(ritual regalia)으로 구별된다. 깃털 머리장식(feather head-dresses), 정교한 팔장신구(bracelets), 특별한 형태의 귓불-플러그와 입술-플러그, 테이퍼(tapir)나 페커리(peccary)의 발굽처럼 소리를 내는(noise-making) 물건을 매단 허리띠와 다리띠(belts and leg bands) 등이 그러하다. 더 중요한 의례들은 ‘세례(baptism)’, 즉 의례적으로 명성 높은 이름을 수여하는 명명 의례이거나 입문 의례다. 특정 장식물들은 실제로 이름을 받거나 입문하는 사람들을 나머지 많은 의례 수행자들과 구별한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의례 복식의 전체 목록은 의례적 활동을 일상적인 활동과 관계에 대비해 표시한다. 의례 자체의 맥락 안에서도, 의례를 수행하는 자와 특별한 복식을 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은 채 구경하는 자 사이의 대비는 유지된다. 후자의 중요한 집단은 그 의례에서 이름을 받거나 입문하는 아이들의 부모다. 부모는 춤에 직접 참여할 수 없지만 많은 춤꾼에게 음식을 대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 역할을 맡은 부모는 실제 의례 수행자들에게 매우 무례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대우를 받는다. 수행자들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소리친 뒤 그 양과 질을 큰 소리로 불평한다.

 

카야포의 신체 장식은 일상적 형태와 신성한 형태를 통해, 각 지위에 특징적인 역할 또는 활동·관계 양식(modes of activity and relationship)과 함께, 서로 구별되는 사회적 지위 범주들의 통합된 체계를 구성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사회적 분류는 <표 1A>에 제시되어 있다. 각 범주를 구별하는 여러 신체 장식의 형태와, 그것들이 상징하는 역할 또는 활동 양식은 <표 1B>에 요약되어 있다. <표 1B>에서 여러 형태의 성스러운 ‘복식’과 세속적 ‘복식’(sacred and secular ‘dress’) 사이에 나타나는 구별이 <표 1A>의 전체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목하라.

 

<표 1A> 카야포의 사회적 분류: 지위

  성스러운
(명성이 더 높음)
세속적
(명성이 더 낮음)
사회적
(상대적으로 사회화됨)
입문자
이름 받은
노년 남성
젊은 남성
  의례 수행자 성인여성
자연적
(상대적으로 사회화되지 않음)
관람자 아동
나이 있는 아이들
  입문자의 부모 영아

 

 

<표 1B> 카야포의 역할 분류(사회적 활동의 성질과 양식)와 ‘복식’ 표지

  성스러운 세속적
사회적 입문 의례 거침,
이름 받음

특별한 팔장신구
표현력
작은/큰 입술-플러그
사회화된 생식력
음경 덮개
신체적 연장: 아이
긴 머리카락
사회화의 행위자
성인 채색 스타일
사회화된 이해력
귓불 구멍
의례 춤꾼
의례 장식
 
자연적 관람자 또는 부모-일꾼’
장식 없음
  신체적 연장 없음
짧은 머리카락
사회화의 대상
아동 채색 스타일
 
  부모의 신체적 연장
긴 머리카락
이해력 없음
귓불-플러그

 

 

명명 의례(naming ceremonies)에서 수여되는 이름은 특정한 범주의 친족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부류의 ‘아름다운(beautiful)’ 이름이다. (남자 아이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친할아버지에게서, 여자아이는 고모와 친할머니·외할머니에게서 이름을 받는다.) 의례에서 예우를 받는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지는 이름의 의례적 명성에 걸맞게 특별한 장식으로 꾸며지며, 특히 구슬과 깃털 장식이 달린 정교한 팔장신구를 착용한다. 입문자들 역시 팔장신구로 구별되지만, 이들의 것은 전완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하고 유난히 무겁고 부피가 크다. 입문 의례 자체도 이 팔장신구의 이름을 따서 ‘검은 팔장신구(the black bracelets)’, 또는 글자 그대로는 ‘검은 골수(black bone marrow)’라고 불린다. 팔장신구는 선명한 빨강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린다. 팔장신구가 입문자와 명명 의례에서 이름을 받는 사람의 표지로서 상징적으로 적절한 까닭은, 신체의 각 부위가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와 연결된 색채 상징에 관한 동일한 관념들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신체의 말단부가 자아의 심리·생물학적 층위가 사회적 공간으로 연장되는 것을 나타내고, 이 점에서 손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형적인 말단부라면, 정교한 팔장신구는 그러한 연장에 사회적 형태를 부여하는 데 적합한 상징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해당 의례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첫 번째 상징적 혼인이 수반되는 남성 성인 지위로의 입문에서는, 유아적이고 그저 개인주의적일 뿐인 리비도의 억압과 사회적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성적 능력과 생식력의 강화가 모두 이루어진다. 앞에서 보았듯 검정과 빨강은 각각 억압과 감각의 강화를 상징하며, 사회적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성적 능력과 생식력의 강화가 이루어진다. ‘검게 되는(blackened)’ 것, 곧 억압되는 것이 뼈의 내부 실질이라는 점은 사회적 관계 맺음의 사회화 이전 생물학적 토대를 억제한다는 관념을 적절히 전달한다. 동시에 이러한 억제가 이루어지는 매개인 이른바 ‘검은(black)’ 팔장신구가 실제로 빨갛다는 사실은, 바로 그 팔장신구가 나타내는 사회적 형태 속에서 그 토대가 활성화됨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입문 의례의 팔장신구는 신체 장식 체계 전체와 그것이 표현하는 사회적 개념들의 여러 기본 원리를 그 안에 함축한다.

 

 

# [7. 의례적 부 그리고 아름다움]

 

일반적인 의례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앞서 설명한 깃털 머리장식, 귓불-플러그, 목걸이, 팔장신구, 허리띠·다리띠 등 의례 복식의 표준 범주 안에서도 상당한 변이(considerable variation within the standard categories)가 나타난다. 이 가운데 많은 변이는 이름 자체와 마찬가지로 삼촌이나 할아버지에게서 남자 조카나 손자에게(또는 그에 상응하는 여성 친족 사이에서) 전해진다. (예를 들어 머리장식에 특정한 종류의 새 깃털을 사용하는 것, 귓불-플러그에 감아 놓은 면실이나 민물조개 껍데기 같은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 팔장신구에 붉은 금강앵무의 가슴 깃털을 사용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이러한 변이는 착용자가 특정 친족과 맺는 관계에서 얻는 사회적 정체성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이러한 독특한 의례 복식의 항목들은 앞에서 언급한 ‘장식물(paraphernalia)’을 이루며, 의례의 장에서 이름과 나란히, 그러나 이름과는 별도로 수여된다. 카야포는 이런 부속 장식물을 ‘귀중품(valuables)’, ‘부(wealth)’, 또는 ‘재화(riches)’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그리고 유일한 용어로 부른다.

 

카야포 사람에게 왜 의례 춤을 추면서 특정한 머리장식을 쓰느냐고 물으면, 그는 아마도 “그것은 나의 부(It is my wealth)”라고 답할 것이다. 왜 춤을 추느냐고, 더 나아가 왜 그 의례를 거행하느냐고 물으면, 거의 틀림없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To be beautiful)”라고 대답할 것이다. (통상적인 카야포의 표현을 영어로 옮겨도 똑같이 정확하다.) 카야포에게 부와 아름다움(beauty)은 긴밀하게 연결된 관념이며, 둘 다 명성 높은 의례 복식으로 부호화되는 사람의 여러 측면을 가리킨다. 실제로 특정한 ‘아름다운’ 이름은 특정한 장식 형태(즉 특정한 종류의 ‘부’), 예를 들어 귓불-플러그와 연결된다. ‘아름다운 사람들(beautiful people)’(의례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명명 의례를 거치지 않아 ‘평범한(common)’ 이름만 가진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보다 더 많은 ‘부’를 지닌다.

 

신체 장식의 형태를 띤 ‘부’와 ‘아름다움’의 연결은 한데 모인 의례 수행자들이 부르는 합창 찬가의 가사에 인상적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큰(great)’ 또는 ‘아름다운’ 명명 의례를 구성하는 일련의 의식을 춤추어 수행하며, 각 노래마다 달라지는 통일된 발걸음에 맞추어 노래한다. 이 노래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동물들, 특히 새들의 노래다. 새들은 카야포의 서정시와 춤에 영감을 주는 존재이며, 여러 방식으로 인간에게 그것들을 전해 주었다. 카야포의 방대한 노래 목록 가운데 두 대목을 예로 들어 보자. 한 새는 자기 말을 듣는 인간에게 자랑스럽게 뽐낸다.

 

> 우리[새들]가 하늘에 닿지 못하겠는가?

> 물론, 우리는 바로 그 구름을 움켜쥐고,

> 팔장신구처럼 다리에 둘둘 감은 채,

> 그렇게 앉아 구름의 우레를 즐길 수 있지.

 

또 다른 새는 땅에 매인 인간성(earthbound humanity)을 향해 마음을 뒤흔드는 부름을 외친다.

 

> 나는 태양의 가지[빛줄기] 사이를 날아다닌다.

> 나는 태양의 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 나는 그 가지 위에 내려앉아

> 온 세상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 내 곁의 하늘로 너희 몸을 던져라!

> 내 곁의 하늘로 너희 몸을 던져라!

> 새들의 피와 깃털로 너희 몸을 덮고

> 나를 따라오라!

 

피와 깃털에 관한 권고(admonition)는 춤추는 사람의 몸을 그 사람 자신의 피로 덮은 다음, 그 피를 접착제로 삼아 금강앵무·독수리·수리류의 가슴 깃털이나 솜털을 붙이는 기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아마도 신성한 복식 가운데 가장 명성이 높은, 곧 가장 ‘아름다운’ 형태일 것이다. 이 노랫말들은 카야포 언어에서 춤추기(더 넓게는 모든 의례의 거행)를 ‘날기(flying)’라고 부른다는 사실의 함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가장 흔한 의례 장식인 깃털 머리장식을 가리키는 말이 ‘새(bird)’라는 말의 의례적 형태라는 사실의 함의도 이해하게 해 준다.

 

새들은 날며, ‘온 세상(the whole world)’을 ‘훑어볼 수 있다(can scan)’. 새들은 세계의 분할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다. 카야포에게는 이것이 총체성(totality)을 직접 경험하는 것, 곧 세계의 전체성(wholeness)을 지각해 자아를 통합하는 것에 대한 최고의 자연적 은유로 보인다. 일상적인 인간의 삶, 즉 사회적 삶이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것들을 초월적으로 통합하는(transcendental integration of what ordinary human that is, social life separates and puts at odds) 이러한 전체성의 원리(principle of wholeness)가 카야포의 ‘아름다움’ 관념의 본질이다.

 

 

# [8. 일상과 의례의 역전, 친족 관계의 재통합]

 

의례 복식과 그 복식을 착용하고 수행하는 신성한 활동에 구현된 이 관념의 두 측면은, 앞에서 카야포의 일상적 ‘복식’ 그리고 그 바탕에 놓인 전제들에 관해 설명한 맥락에서 보면 그 설명과 어울리지 않으며 심지어 모순(contradictory in the context)되는 듯하다.
첫째, 일상적 신체 장식은 개인의 ‘자연적’ 에너지와 힘에 사회적 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의례 복식은 그 반대의 관념을 나타내는 듯하다. (깃털 머리장식, ‘동물’ 무늬의 신체 채색, 몸을 피와 깃털로 덮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의례 복식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활동, 곧 사회의 짜임 자체를 주기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거대한 신성한 수행에 참여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자연적 형태를 부여하는 듯하다.
둘째, 신성한 복식은 의례의 노래와 춤 자체가 야생동물과 새들에게서 유래했다는 관념과 함께,
일상적 신체 장식의 의미를 뒤집는 듯하다. 일상적 신체 장식은 암묵적으로 ‘자연적’ 핵심(‘natural’ core)과 ‘사회적’ 주변부(‘social’ periphery) 사이의 관계에 기초한다. ‘자연적’ 핵심은 인간의 몸(사회학적 수준에서는 기초가족)이다. ‘사회적’ 주변부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몸 바깥의 공간(친족 구조에서는 가까운 가족 바깥에 있으면서 아이에게 이름과 의례 장식물을 주는 더 먼 혈족들)이다.
반면 의례적 공간은 ‘자연적’ 주변부와 ‘사회적’ 중심부 사이의 관계에 기초하는 듯하다. ‘자연적’ 주변부는 마을 경계 너머의 밀림(의례 복식과 의례 자체의 원천인 새와 동물이 사는 곳)이며, ‘사회적’ 중심부는 마을 중앙 광장(신성한 춤을 실제로 수행하는 곳)이다.

 

신성한 복식에 부호화된 공간, 그리고 자연과 사회의 기본 관계가 이처럼 역전된 것(inversion)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상적 사회 관계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다른 역전과 나란히 대응한다. 이 두 역전은 바로 신성한 의례 체계의 토대를 이룬다.
첫 번째 역전은 이름을 주고 의례적 ‘부’(특별한 장식물 등)를 수여하는 핵심적 의례 관계에 관여하는
친족 관계의 유형과 관련된다. 이 유형은 일상적 신체 장식(음경 덮개·귓불-플러그·입술-플러그 등)의 복합체가 표시하는 가족 관계의 변환에 관여하는 친족 관계 유형과 대비된다. 후자는 전형적으로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같은 가까운 가족 관계, 또는 사위와 장인이라는 핵심적인 확대가족 관계를 포함한다. 이 관계들은 가족 내부의 지위들을 직접 연결하거나 혼인을 통해 두 가족을 직접 연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직접적(direct)’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의례 관계는 조부모와 손자녀, 삼촌과 남자 조카, 고모·이모 등의 여성 친족과 여자 조카를 연결한다. 이 관계들은 사이에서 연결 고리가 되는 친족들을 건너뛴다. (그 연결 친족은 의례적 이름이나 장식물을 받는 아이의 부모이며, 자신들이 이름을 주는 친족의 자녀 또는 형제자매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간접적(indirect)’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직접적 관계의 구조(structure of direct relations)는 발달해 가는 개인이 평생 소속되는 가족·확대가족·가구의 구조 안에서 한 지위에서 다른 지위로 이동하며 올라가는 일종의 사다리 또는 일련의 계단으로 기능한다.
이 과정의 첫 단계는
가까운 가족 관계라는 ‘자연적’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개인은 처음에 단지 부모의 ‘자연적’ 생식력의 연장으로 규정된다. 그 뒤의 생애과정은 개인이 이 최초의 ‘자연적’ 통일체에서 분리되어 공동체의 사회적 삶에 통합되는 일련의 단계다. 이 과정에 수반하여 자신의 ‘자연적’ 힘도 발달하고, 마침내 이번에는 그 힘이 새로운 가족의 토대가 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회화 과정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이 두 번째 ‘자연적’ 가족 단위가 분산되고 개인이 자녀의 배우자에게
장인·장모 또는 시부모가 되는 때에 찾아온다. 이로써 집에서는 확대가족 가구의 가장이라는 명성 높은 역할로, 남성은 공동체 전체에서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로 옮겨 간다. 앞서 보았듯 이 과정의 주요 단계마다 ‘일상적(everyday)’ 종류의 신체 장식의 변형이 표지로 작용한다. 이 과정의 전체적 형태는 몸과 기초가족이라는 ‘중심적(central)’ 원천에서 ‘자연적’ 에너지와 힘이 점차 빠져나와, 물리적·사회적 공간에서 이 원천에 대해 ‘주변적(peripheral)’ 관계에 놓이는 사회적 형태와 힘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적’ 힘과 관계 단위, 곧 기초가족들이 비워지고 분산되는 대가로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어느 순간이든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처음에는 더 넓은 사회 관계의 공동체에 아직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신생아나 새 가족에 구현된다. 과정의 끝에는 분산된 가족의 흩어진 구성원들로 나타나며, 그 가족의 젊은 구성원들은 이미 새로운 가족을 이룬 상태다. 이러한 변환으로 가능해진 사회의 통합은 가까운 가족이라는 최초의 자연적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자연적’ 힘이 외재화(externalisation)되고 사회적으로 전유되는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의례 체계는 수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나타낸다. 부모에게 속한 분산된 직접적·‘자연적’ 관계(그들이 떠나온 가족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이제 핵심적인 간접적 관계가 된다. 바로 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부모들의 자녀와 동일시되는 것이 의례의 요점이 된다. 나는 여기서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개인 이름과 고유한 의례 복식물을 공유한다는 데 함축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동일시의 요점은, 부모가 이전에 속했던 가족의 분산되고 해체된, 또는 ‘자연적’인 관계와, 부모가 현재 이루고 있는 가족의 아직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관계, 곧 그 자녀들 사이의 연결을 다시 확인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이 관계들을 재통합(reintegration)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은 기초가족 같은 ‘자연적’ 집단의 특징인 직접적 관계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토대가 없는 새로운 간접적 기반, 요컨대 순전히 ‘사회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례적 행위를 통해 성립하는 새롭게 통합된 ‘전체(whole)’는 사회 관계의 ‘자연적’ 토대를 재통합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원형이 되며, 그리하여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 곧 개인 이름·독특한 의례 복식·그 밖의 개인적 ‘부’를 담는 적절한 매개체가 된다.

 

사회적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이름을 받는 중심의 개인과 그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가족의 주변부(periphery)’에 놓인 ‘자연적’ 관계들의 정체성 속성이 중심(centre)’에 놓인 행위자에게 옮겨져 ‘사회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연적’ 힘과 ‘사회적’ 힘 그리고 성질의 평형(equilibrium)이라는 관점에서는,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앞으로 자연적 힘이 빠져나갈 일이 사회적 속성의 유입에 의해 미리 상쇄된 것이다. 이 사회적 속성들 자체는 사회적 통합의 대가로 분산된 ‘자연적’ 하부구조의 요소들이 의례적 행위라는 사회적 장치를 통해 재통합된 산물이다.

 

이제 사회적 공간의 주변부에서 온 ‘자연적’ 속성들을 중심부에 놓인 행위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측면들로 상징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의례가 불러일으키는 사회 관계의 통합적, 곧 ‘아름다운’ 구조적 성질을 은유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의례 장식은 이 과정을 단순히 부호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과 더불어 의례 수행자들의 정체성이 동시에 새롭게 규정되고 ‘사회화’되며 ‘아름다움’을 부여받는 구체적인 매체다.

 

앞의 분석은 전체성·통합·완결로서 아름다움이라는 카야포 관념이 지닌 의미 전체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일차적 맥락인 신성한 의례에서 아름다움은 간접적’(매개된) 관계에 기초한 ‘사회적’ 전체의 창출과 연결되는 가치다. 이 전체는 ‘직접적’(매개되지 않은) 관계로 이루어진 더 단순한 자연적 전체(기초가족들)의 분리된 요소들을 재통합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전체를 이루는 능력을 지닌 사회 자체의 이상적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카야포 사회생활의 주요 가치 가운데 하나다.

 

 

# [9. 지배적 우위 그리고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의례적 행위에 관여하는 사회 관계와 문화적 관념의 복합체와 연결되듯이, 일상생활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관계와 범주의 복합체는 또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가치는 분리·대립·불평등의 관계에 해당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다움의 반대다. 우리는 그것을 ‘지배적 우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개인이 사회적 발달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확대가족과 공동체의 구조 안에서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 옮겨 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얻게 되는 명성·권위·개인적 자율성·타인을 통제하는 능력의 결합을 뜻한다. 카야포 자신들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인 이 가치에 자기 언어의 어떤 명칭도 붙이지 않는 반면, 매우 다양한 활동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끊임없이 사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중요하다. 그 활동에는 더 좋게 보이게 하고 싶은 분열적이고, 따라서 ‘추한(ugly)’ 성격의 활동까지 포함된다.

 

명칭이 없다고 해도 해당 가치의 존재, 그리고 의례 영역 바깥의 카야포 사회적·정치적 삶을 조직하는 중심으로 그 가치의 중요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노년 남성들의 공적 활동에서, 예컨대 그들에게 특징적인 공격적이고 현란한 연설 활동에서 가장 높고 집중된 표현에 이른다. 입술-플러그, 특히 연령단계별 입술 장식의 전체 연속체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두드러지게 돌출되는 노년 남성의 장식은, 남성의, 특히 노년 남성의 사회적 정체성의 성질로서 이 가치와 직접 연결된다. 그러나 ‘지배적 우위’는 노골적인 힘이나 강제적 억압의 관계라기보다 상징적 속성, 곧 확대가족과 공동체 구조의 위계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표현하도록 문화적으로 부여된 성질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앞서 설명한 일상적 신체 착장물의 전체 체계가 표시하는 연령·성별·가족·공동체 지위 범주들의 전체 구성을 표현한다.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도 자신들에게 적절한 영역 안에서는 이 성질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다. 다만 공동체 전체의 관계라는 맥락에서는 이들이 지배적 위치의 노년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지배적 우위’와 ‘아름다움’이라는 두 가치는 모든 카야포의 사회적 활동과 목표에 방향을 부여하며, 사회적 행위의 가장 일반적인 목적이자 개인적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성질을 이룬다. 사회적 행위자의 정체성은 지위·성별·연령·사회화 정도 등에 따른 분류에 의해서만큼이나, 그들이 자기 활동을 향하게 하는 목표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나는 신체 장식이 다른 종류의 범주들과 더불어 이러한 가치들을 부호화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다. 따라서 신체 장식은 개인의 전체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일련의 사회적 범주로 이해되는 객관적 정체성뿐 아니라, 사회적 행위자가 지니는 주관적 정체성도 뜻한다. 신체 장식은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 모두에서 고려되는 개인과, 관계의 구조라는 객관적 측면과 가치의 체계라는 주관적 측면 모두에서 고려되는 사회 사이를 매개해 그렇게 한다. 나는 신체 장식의 부호 체계가 이 두 측면에서 수행하는 상징적 매개(symbolic mediation)가 카야포 문화의 관점에서 카야포 사회 관계의 미묘한 차이에 체계적이고 섬세하게 맞추어져 있다는 걸 입증하고자 했다. 카야포 사회의 구조는 그 사회의 가장 높은 가치와 가장 근본적인 개념적 전제들(예컨대 자연과 문화의 관계, 표현과 이해의 방식, ‘사회화’의 성격 등)을 포함하여, 모든 연령·성별·일상적 역할과 의례적 역할을 대표하는 카야포 사람들의 채색과 장식을 통해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10. 문화적 주체의 구성 그리고 사회적 피부]

 

상징적 매체로 보았을 때 신체 장식만이 이러한 성질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이런 매체 또는 언어가 여럿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언어 자체다. 그중 신체 장식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는, 그것이 개인을 사회적 행위자 또는 문화적 ‘주체(subject)’로 구성하는 일과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관련된 매체라는 데 있다. 이는 모든 사회와 사회집단의 근본적인 관심사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자아의 상징 또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로 몸에 표준화된 상징적 형태를 부여하는 일은, 구성원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와 무관하게, 모든 사회에서 언제나 중대한 일이 된다.

 

주체의 구성(construction of the subject)’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대체로 유사한 과정이며, 신체 장식 체계를 연구하는 일은 그 과정에 무엇이 수반되는지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제안할 수 있다. 카야포의 사례가 보여 주듯, 그것은 본질적으로 몇 가지 기본 유형의 사회적 관념과 범주가 중첩·결합(conflation)하는 문제다.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범주, 활동 양식, 예를 들어 개인적 또는 집단적 활동과 일상적 또는 신성한 활동, 사회적 지위의 유형(성별·연령·가족 내 역할·정치적 지위 등), 개인적 성질(‘사회화’의 정도나 사회적 행위자가 보이는 상대적 수동성 또는 능동성 등), ‘지배적 우위’나 ‘아름다움’ 같은 사회적 가치의 양식(modes of social value)이 포함된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이러한 기본 범주들은 문화적으로 고유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신체 장식이라는 상징적 매체를 구성한다. 이 종합적 양상은 해당 문화가 가치·사회적 행위·사람됨 또는 자아성에 관해 지닌 기본 관념을 많은 부분 드러내 준다.

 

카야포를 분석하면 이러한 종류의 의미와 가치가 종합된 세 가지 넓은 묶음이 드러난다.
하나는 ‘자연적’ 힘과 속성을
사회적 형태로 변환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카야포의 사회화 관념과 관련된다. 청결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에 이어 이 관념의 기본적인 상징적 매개가 되는 것은, 몸통과 말단부를 각각 검정과 빨강의 구역으로 대비시키는 신체 채색의 형태다. 몸의 ‘자연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을 구획하는 이 기본 도식은 더 높은 분화 수준에서 머리카락 스타일을 통해 구체적으로 변형된다. 긴 머리와 짧은 머리의 대비는 개인의 리비도적 능력과 생식력이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연장되는 연속적인 단계들을 표시하는 데 쓰인다. 마지막으로 음경 덮개(남성이 긴 머리로 바꾸는 것과 연동된다)는 남성의 생식력이 사회적으로 전유되는 결정적인 지점을 표시한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하게는 이 전유가 갖는 집단적 성격을 표시한다.
두 번째 주요 복합체는 사회적 행위 능력의
수용적 성질과 능동적 성질의 구별, 그리고 두 성질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도 기본적인 표지는 신체 채색이며, 이번에는 아동 스타일과 성인 스타일 사이의 구별이다. 이 기본 구별은 한편의 뚫린 귓불과 귓불-플러그, 다른 한편의 뚫린 입술과 입술-플러그로 이루어진 집합에 의해 다시 구체적으로 변형된다. 이 집합은 듣기와 말하기라는 관념에 연결된 구체적인 의미를 더한다. 각각 수용적 앎과, 결정과 행동 계획의 능동적 표현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이 두 묶음을 가로지르는 것은
활동 양식들 사이의 넓은 구별이다. 여기서 가장 강하게 표시되는 구별은 일상적 행위와 신성한, 곧 의례적 행위 사이의 구별이며, 후자는 풍부하고 다양한 장식에 의해 전자와 구별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개인 또는 가족 수준의 활동과 공동체 활동 사이의 더 기본적인 구별이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공동체 활동이 모두 신성한 성격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모임이나 여성 결사의 회합에서는 의례가 없더라도 집단적 채색을 하거나 야자 잎으로 만든 간단한 머리장식을 착용할 수 있다.

 

카야포 체계에 관한 이러한 분석에서 중요한 구조적 원리 하나가 드러난다 상징적 부호 체계의 위계적 또는 반복적 구조(hierarchical or iterative structure of the symbolic code). 상징적 의미의 각 주요 묶음은 그 묶음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징이 표현하는 일반 관념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조하거나 변형하는 일련의 형태들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구조적 원리는
체계 전체의 중첩 결합적 성격(multiplicative character)이다. 내가 이 말로 뜻하는 것은 어느 시점이든 어떤 카야포 개인의 ‘복식’에도 세 가지 기본 묶음이 필연적으로 동시에 존재하거나 중첩·결합한다는 것이다. 영아든 성인이든 그에게 적절한 스타일로 몸을 칠하려면, 두 스타일에 공통된 몸통과 말단부 사이의 동심원적 구별을 동시에 따라야 한다.

 

첫째 각 묶음 내부의 의미 수준들이 중첩·결합하고, 둘째 각 묶음이 다른 묶음들과 중첩·결합하며,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여 각 묶음을 이루는, 앞서 열거한 더 기본적인 의미와 가치의 범주들이 중첩·결합하는 것, 이것이 내가 ‘문화적 주체의 구성(the construction of the cultural subject)’ 또는 행위자의 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젊은 남성들이나 노동자들이 이루는 집단처럼 ‘집합적(collective)’ 주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만,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여기서는 이 문제를 제쳐 두겠다.)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그가 행위하는 사회적 세계의 구성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그 구성의 한 측면이다.) 카야포의 사례가 시사하듯, 이것은 개인 수준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평형 또는 평형을 이룬 성장을 향해, 말하자면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평형을 말할 때 내가 가리키는 것은 사회든 개인이든 그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문화적 이상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카야포에서는 개인 내부의 생물학적·리비도적, 곧 ‘자연적’ 힘을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로 외재화하는 것과, ‘외부의(external)’ 자연적 힘을 사회구조와 행위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토대로 사회화하는 것은 분명히 서로의 은유적 역전이다. 이 사회화가 없다면 그 행위자들은 부모의 생물학적 연장으로만 규정될 것이다. 두 과정은 서로를 보완한다. 마치 그 과정의 두 측면에 각각 연결된 사회적 가치인 ‘지배적 우위’와 ‘아름다움’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과 같다. 두 과정과 그에 연결된 가치들이 균형을 이루는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 카야포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상태다. 동시에 이 균형은 사회화된 개인의 인격이 이루는 통일성과 균형의 토대이기도 하며, 그 인격도 마찬가지로 동적 평형으로 이해된다.

 

내가 입증하고자 한 요점은,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힘들 사이의 이러한 균형(balance), 곧 카야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원리가 신체 장식이라는 매체를 통해 카야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몸 위에서 체계적으로 분절되어 표현되고, 말하자면 실제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우리가 처음에 제시했던 일반 가설을 뒷받침한다. 곧 어느 인간 사회에서나 신체 표면은 특유하게 복잡한 종류의 경계가 되어, 그 양쪽에 놓인 영역들을 분리하는 동시에 사회적·개인적·심리 내부적 의미의 서로 다른 수준들을 중첩·결합한다는 가설이다. 피부와 머리카락은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 사이의 구체적인 경계다. 그러나 ‘자아(self)’가 사회적 구성요소와 ‘자연적’, 곧 리비도적 구성요소가 합성된 산물이라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며, 우리의 탐구도 이를 확인했다.

 

한 수준에서 ‘사회적 피부(social skin)’는 개인 행위자와 다른 행위자들 사이의 사회적 경계를 모형화한다.
그러나 더 깊은 수준에서는 개인의 사회화 이전 리비도적 에너지와 ‘내면화된 타자들(internalised others)’, 곧 프로이트가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라고 부른 것을 이루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 사이의 내적인
심리적 격막(psychic diaphragm)을 모형화한다.
또 다른 세 번째, 거시사회적 수준에서는 ‘사회적 피부’를 이루는 피부와 머리카락의 관습화된 변형이 개별 개인이 아니라 개인들의 범주 또는 부류(예를 들어 영아
, 노년 남성, 출산 연령의 여성 등)를 규정한다. 신체 장식 체계 전체(‘사회적 피부’의 모든 변형을 하나의 집합으로 본 것)는 각 부류를 다른 모든 부류와의 관계에 따라 규정한다. 따라서 이 세 번째 해석 수준에서 ‘사회적 피부’는 사회적 범주들(social classes) 사이의 경계가 된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몸이라는 물리적 표면이 이 세 수준의 관계를 중첩·결합하도록 체계적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현대 사회과학의 대부분은 이 관계들을 분리하여 서로 고립된 상태로 다루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저 이국적인 현상, 곧 비교적 미분화된 발전 수준에 있는 인간 사회의 원시적 표현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복식과 몸단장의 부호 체계 역시 같은 종류의 문화적 장치인가?

 

 

# 출판사 주

 

이 글은 다음 글의 재수록이다.

TURNER, Terence S., 1980, “The Social Skin”, Jeremy CHERFAS & Roger LEWIN(eds.), Not Work Alone: A Cross-Cultural View of Activities Superfluous to Survival, London: Temple Smith, pp.112~140.

재수록을 허락해 준 테런스 터너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원문의 문체와 표기 스타일을 유지했음을 독자에게 알려 둔다.

 

 

# 참고문헌

 

BELL, Quentin, 1949, On Human Finery, New York: A. A. Wyn.

SAHLINS, Marshall, 1976, Culture and Practical Reas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TURNER, Terence S., 1978, “The Kayapo of Central Brazil”, Anne SUTHERLAND(ed.), Face Values: Some Anthropological Themes, London: BBC Publications, 24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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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준규 번역 
zingari.JQ@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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